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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피아노 반주오늘의 수필
  • 수정 2019.10.16 09:20
  • 게재 2019.10.16 09:16
  • 호수 442
  • 11면
  • 박은희 김해 시의원(report@gimhaenews.co.kr)
▲ 김해 시의원

인간의 고뇌처럼 길고 질긴 여름이 지나간다. 여기저기서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내 몸과 마음에서도 중년의 나이가 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난여름에 공식적인 워크숍 참석차 대구로 가는 기회가 있었다. 열차에 몸을 싣는 순간, 내 스무 살 적 비망록 속의 추억이 파노라마로  다가왔다.

이십대는 가장 순수했던 청춘의 시절이다. '대구는 나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과 딸도 20대 청춘을 보낸 곳이다. 우리 가족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더욱더 그리운 곳이기도 하다. 진영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7년 동안 완행열차의 푸른 시트에 청춘을 맡겼던 밀양역을 스치듯 지나간다. 밀양 역사 너머로 줄지어 선 가로등에도 빛바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걸려있었다. 내 추억의 비망록 속의 장소는 주로 역이다. 진영역, 밀양역, 동대구역, 대구역 등은 떠나고 도착하고, 만나고 헤어지는 이정표들이다. 대학 때는 밀양에서 대구로 열차통학을 했다. 내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졌다. 특히 대구역은 대학교의 같은 과 친구가 나를 수없이 배웅해 줬던 곳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하고 이별하게 하는 간이역이랄까?

대학교 때 나는 피아노를 쳤다. 27년 전 어느 겨울날, 친구 지은이가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식을 올렸다. 당연히 나는 두 사람을 위해 웨딩마치를 쳐주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두 사람은 마치 포근한 온대지방에서 자라는 두 그루 싱싱한 나무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겨울이 지나면 봄날이 올 것임을 더욱 확신했다. 하지만 삶의 계절에서는 겨울이 지나도 봄이 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친구만큼 착했던 남편은 빚보증에 걸려 불행의 뿌리가 가정에 내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여린 지은이는 그 후 정신적 고통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지은이는 스트레스성 병마로 인해 간이 나빠졌다. 여러 차례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병상에 누워 있어도 자식과 남편을 위해 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병마와 싸우는 동안 친구의 얼굴에선 그늘을 볼 수 없었다. 소아마비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었던 시댁 식구들도 그때는 남편을 감싸 안는 지은이의 마음씨에 감동했다. 병문안을 갔을 때 지켜본 그녀 남편의 한결같은 간호는 모든 친구들을 감동시켰다.

그 해, 설 명절이 지나고 친구한테서 여러 번 전화가 왔었다. 이제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오렌지 주스 외는 어떤 것을 먹어도 구토를 하고 만다고 울먹였다. 물 한 모금 삼킬 수 없다고 호소했다.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병원에 찾아갔을 때 친구는 노란 개나리꽃보다 더 진한 노란색으로 온몸이 물들어 있었다.

친구는 41살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하얀 국화 바구니를 안고서 영안실로 향했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친구의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는 이모가 되겠다는 다짐이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떠난 친구가 내게 부탁한 마지막 약속이기도 했다. 그 후 친구의 휴대폰도 친구 남편의 휴대폰도 울리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났다. 사방에서 국화향기가 피어나는 가을이었다. 오랫동안 잠잠했던 친구의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자 남편이 가라앉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인이 되어 버린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내게 허락받고 싶어 먼저 알린다며 재혼을 한다고 했다. 다시 침묵을 두더니 피아노 반주를 부탁했다.

하늘나라에 간 친구가 생각나서 나서고 싶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대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눈물을 흘리며 웨딩마치를 피아노로 쳤다. 반주를 하며 두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지은이의 명복도 다시 빌었다.

지금도 가을이면 한동안 상실의 몸살을 한다. 국화꽃을 보면 내 가장 친한 친구 지은이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대구행 열차의 푸른 시트가 그립다. 스무 살 그때처럼….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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