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민주 수필가

여자를 보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 기준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 왔다.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누군가가 이상형을 물어오면 망설임 없이 "키 크고 예쁜 여자"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되돌아오는 말은 "야! 꿈 깨"였다. 그때는 그야말로 꿈속에서 헤맸던 시절 같다. 결혼한 후에는 명랑한 여자가 아름답고, 이립을 지나 불혹이 되어선 마음씨 곱고 착한 여자가 아름답고, 지천명에는 어른을 공경하는 정숙한 여자가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키가 크고 작다든지 얼굴이 예쁘고 못생겼다든지 몸매가 뚱뚱하고 날씬하다든지 하는 외모에서 벗어난 지가 결혼 후부터였으니 꽤 오래되었다.

이순을 바라보는 현재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이상하리만큼 배가 불룩한 임신한 여자가 아름다워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두세 살배기 아이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걸어가는 여자의 몸가짐은 가려(佳麗) 하다못해 경외(敬畏)스럽다. 얼마나 힘들까 하면서도 이런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면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유는 여동생을 가져 배가 불룩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외가에 가던 어릴 적 잠재한 기억이 깨어나서인지도 모른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들도 할머니나 외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일 터이다. 이제는 생을 반추하면서 아들의 아들이 그리워질 나이가 되어간다는 뜻도 담겨있겠다.

배를 내밀고 걸어가는 저 힘들어 보이는 수고가 세상을 여는 힘이다. 배가 불룩해질 수 있음에도 배불러지는 수고로움을 외면한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아기의 울음과 웃음소리로 세상을 열어젖히지 않으면 세상은 영원히 닫혀버린다. 배가 불룩하여 아름다워질 수 있는 시기는 길지 않다. 이마저도 여자만이 선택되어 누리는 특권이라면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일까. 주어진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삶 중에서 무언가 놓치고 사는 삶이라고 헤아린다. 사람이 세상에 왔다면 이름을 남기는 일도 나쁘진 않겠지만 무엇보다도 후손을 남기고 가야 한다. 고(故) 장영희 교수는 이를 두고 '작은 풀 한 포기, 생쥐 한 마리, 풀벌레 한 마리도 그 태어남은 이 우주 신비의 생명의 고리를 잇는 귀중한 약속이다'라고 했다.

약속은 지키는 게 만고의 진리다. 배가 불룩한 여자가 아름답다 함은 보이는 그대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여 세상에 태어나게 함이며 새 생명은 다시 새 생명을 낳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배부른 여자를 미인으로 보는 나와 같은 사람이 얼마일지는 모르나 아름답게 보아주는 사람도 있으니 축복받은 삶으로 수긍된다. 그릇된 사고로 축복받을 수 있는 삶을 포기한다면 소중한 약속을 어기는 일이다. 약속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가서는 우주의 질서가 무너진다. 미래에 대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진리를 넘어 사명으로 본다면 무리일까.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다. 나는 과거를 알기 위해 진품명품이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즐겨 본다. 얼마 전 부산 해운대구 출장감정에서 금방이라도 아기가 태어날 태세의 배가 불룩한 새댁이 시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글씨 한 점을 들고 나왔다. 감정가가 어느 정도 높게 나오자 환한 표정으로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아버지에겐 불룩한 배에 밝게 웃는 모습의 며느리는 감정가를 매길 수 없는 최고의 진품이고 명품일 것이다. 시아버지는 얼마지 않아 새 생명을 안아보는 행복을 누리고 새 생명이 주는 힘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의 불룩한 배에서 태어났고 또 태어난다. 배가 불룩한 어머니의 자태가 진정한 여자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긴말 필요 없이 오로지 새 생명을 가졌다는 현실 하나만으로도 명징하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움을 보는 눈으로 배가 불룩한 임신한 여자를 아름답게 보는 안목을 가져 꽃을 마주하듯 대해주길 당부해본다. 세월이 흘러 여자에 대한 나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어떻게 변해갈지 모르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생아 1명당 국가 예산 1억 돌파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인구가 1억이 되기 전에는 변치 않을 것 같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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