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생림면 봉림리는 유독 시간이 느긋하게 흘러가는 마을인 듯 느껴진다. 그곳에서는 팔순이 넘은 듯한 노파가 아주 느린 걸음을 옮기고, 밭일 하는 이는 일을 즐기듯 천천히 손을 놀리고 있다. 

차사발명장 안홍관의 작업공간인 '지암요(志岩窯)'도 그 속에 있다. 마을입구에서부터 지암요라 쓰인 팻말을 따라가면 바로 찾을 수 있지만, 그래도 헷갈린다면 누렁 강아지가 멍멍 짖고 있는 집을 찾으면 된다. 안홍관은 그곳에서 흙을 말리고, 반죽하고, 빚으며 살아간다. 차사발을 만드는 일 또한 오랜 시간을 들여 느긋하게 해야 하는 것이기에, 봉림리와 안홍관은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 할 수 있겠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지암요에 들렀던 지난 17일, 그는 흙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옷을 입은 채 작업실에서 걸어나왔다. 작업을 해 볼까 하던 참이라고 했다. "그런데 날도 춥고 흙도 차갑고 해서 작업이 잘 안 되네요." 30여년 이상 흙을 만져 온 손으로 차를 따라주며 그가 말했다.
 
안홍관이 도예에 입문한 것은 1975년이었다.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던 백부가 손재주가 범상치 않은 그에게 도자기를 배워볼 것을 권유한 것이다. 이후 1980년에는 차사발의 거장으로 알려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3호 김윤태 선생으로부터 도예학습과 실기를 전수받았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 김해차사발은 '金海' 글자와 높은 밑받침이 특징이다.
2000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김해차사발을 재현하는 일에 매달렸다. 김해차사발은 옆면에 '金海'라는 글자가 쓰여 있고, 밑받침의 굽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말이 '김해'차사발이지,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자료를 거의 찾을 수가 없어 더욱 힘든 시간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각종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김해차사발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차사발의 형태나 크기 같은 것을 정확히 알아야 그걸 재현할 수 있으니까, 직접 보고 만져보는 게 중요했지요. 박물관을 찾아다녔을 뿐 아니라 가마터 근처에서 파편을 주워 그것으로 연구도 해보고, 차사발을 만드는 데 쓰인 흙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김해차사발이 옛날부터 쭉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300년 정도 역사가 끊긴 것이어서 이런 과정이 더 힘들었어요. '돈 안되는 일 한다'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잔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2006년에는 마산 대우백화점 갤러리에서 김해차사발 전시회를, 서울 운현궁에서 조선다완전 등을 개최하며 '국내 최초 김해차사발 전시 도예가'로 자리매김했다. 2008년에는 대한민국평화예술대전에서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고, 일본 노무라미술관에서 김해다완(茶碗) 60점을 전시했다. 이때 유명한 일본차인 우라생께나 오무로생께 등을 다루는 차 거장들이 모두 그의 전시를 보러 오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마침내 그는 대한민국 차사발명장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까다롭기로 유명한 노무라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미술관 측에서 전통 김해차사발의 형태·높이·크기·무게 등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길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3년 동안 미술관 학예사에게 작품을 검사 받고, 작업과정을 보여주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 결과 전시 개최뿐 아니라 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된 엄청난 수의 김해차사발을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었다. 3년의 기다림을 통해 '진짜' 김해차사발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던 셈이다.
 
▲ 안홍관 명장이 재현해낸 12가지 김해차사발.

현재 안홍관은 총 30가지로 알려진 김해차사발의 종류 중 백무지·흑귀얄 사발같은 어소환(御所丸·고쇼마루) 종류와 빗살문·김해명·도형·3곡사발 같은 김해 종류, 현열·입학사발같은 어본(御本·고혼) 종류 등 12가지를 재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미비한 부분은 있지만 김해백자 등 몇 종류는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완벽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가 다른 도예가들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흙'을 제대로 알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흙을 사서 작업하는 데 비해, 그는 산에서 직접 채취한 흙만 사용한다. 채취한 흙은 물에 걸러 침전물을 내리고, 시간이 지나면 물을 따라내고 침전된 흙을 말린 후 반죽한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흙은 '백사토(흰 마사토)'이다. 여기에 점토 등 3~4가지를 섞어 차사발을 만든다. 안홍관의 말에 따르면 '차사발은 흙이 생명'이다.
 
"제가 만든 그릇은 다 가벼워요. 백사토를 걸러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차사발은 500g이 넘어가면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흙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요."
 
그가 차를 따라주었던 찻잔을 손으로 저울질해 보니 그의 말처럼 보통 찻잔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찻잔을 자주 들었다 놨다하며 차를 홀짝홀짝 마시기에 부담이 없는 무게다. 그 자신이 차를 즐길 뿐더러 늘 다인들과 가까이 지내니, 어떤 다완이라야 다도에 적합한지를 자연스레 연구하고 고민하게 된다. 찻잔이나 차사발 모두 우선적으로는 '차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작업실인 생림면 봉림의 '지암요'에서 김해차사발을 재현해내는 그의 손놀림 속엔 명장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안홍관이 김해차사발 재현을 멈춘다면 현재로써는 그의 뒤를 이을 이가 아무도 없다. 차사발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없고, 흙을 제대로 아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그가 힘들게 되살린 김해차사발이 다시 역사 속으로 묻힐 위험도 있다는 이야기다.
 
"저는 김해차사발을 '재현'했다기 보다는 '재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힘들 것 같아요. 전통적인 김해차사발을 100% 재현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느정도 복원이 되면 새로운 김해차사발을 만들어야 합니다. 시대와 흐름에 따라, 다인들의 필요성에 따라 후대에는 차사발도 발전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저도 늘 구상을 하면서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의 작업실에 놓인 발물레 아래, 흙조각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의 손에서 김해차사발이 재탄생하는 그날까지, 안홍관은 발 아래에 흙조각들을 쌓고 또 쌓으며 변함없이 흙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지암 안홍관은

안홍관은 1956년 김해시 풍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인 '지암(志岩)'은 '김해차사발의 맥을 이어보겠다는 뜻을 바위에 새긴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1975년 백부의 권유로 도자기 제작에 입문한 뒤, 차사발의 거장으로 알려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3호 '상주요'의 도봉 김윤태 선생으로부터 체계적인 도예 과정을 배웠다. 이후 1985년 장유에 '대청요'를 출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유가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울산으로 옮겨 가마를 운영하다가, 다시 생림면으로 옮겨 지금의 지암요를 만들었다.
 
2000년부터는 김해차사발의 매력에 푹 빠져 이를 재현하는 데 전념했다. 2007년에는 경남차사발 공모전에서 최고 으뜸상(대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김해시 김해차사발 지정요장으로 선정됐다. 2008년에는 대한민국평화예술대전에서 문화체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또한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 교토의 노무라미술관 김해다완전에 초대돼 작품을 전시하고, 이듬해 한국전통문화예술진흥협회로부터 대한민국 차사발명장으로 선정됐다.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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