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심 수필가

6년 만에 다시 찾아갔다. 이사를 하면서 떠나온 부산 동구 초량을.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사했다. 가보자가보자 말만 하고 아이가 대학생이 되도록 못 가보고 시간이 흘렀다. 김해에서 부산 초량까지 40분이면 갈 거리를 살다 보니 발걸음 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아이가 그렇게도 먹고 싶다는 그 음식점의 쭈꾸미. 우리가 단골로 드나들 때도 손님이 별로 없어서 가게가 곧 문을 닫을 거라 생각을 했던 그 집. 낙후된 도시로 군데군데 재개발이 시작 되었다는 소식에 당연히 헐렸을 거라 생각을 했다. 주말만 되면 먹고 싶다는 그 집의 쭈꾸미를 노래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래 한 번 가보자 가보고 없으면 다른 거 먹고 오자' 하여 찾아갔다.

근처에 당도하니 가림막을 쳐놓고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었다. 과연 있을까? 두근두근 골목길을 들어서니 그 자리 그대로 있는 음식점.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가게 안을 들어가 보니 정겨운 아주머니의 얼굴이 그대로 주방을 지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온 단골손님을 반가이 맞아주는 주인장도 고마웠고 헐리지 않고 그 자리를 버티고 있어 준 건물도 고마웠다. 서비스까지 배불리 먹고 나온 우리는 예전에 살던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아뿔싸, 세일병원 앞의 육교가 없어졌다. 그 육교 위에서 초등학교 가 입학을 하고 돌아오던 꼬맹이 아들이 내 손을 꼭 쥐고 한 말이 잊히질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을 엄마에게 사드릴 거에요."

뜬금없이 한 말이 아직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육교가 없어져 버렸다. 그때 우리는 새 아파트의 최신식 편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을 때인데도 얼마나 더 좋은 집을 사준다는 건지, 하여간 내 손을 꼭 잡고 얘기를 했으니 육교는 없어졌어도 약속은 지켜주겠지.

고등학교 때 제법 큰 상태에서 이사한 딸은 친구들과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하교 후에 먹으러 다닌 피자집을, 밤늦게까지 다니던 독서실 이야기를 했고, 딸만 여섯 중 둘째인 친구를 이야기했다. 야자를 하고 돌아오면 지하철역까지 매일 같이 마중 나와 준 아빠를 생각해 냈다.

그에 비해 초등 꼬맹이였던 아들 녀석은 학교 갈 때마다 지나야 했던 높고 가파른 계단을 이야기했다. 다시 찾아가서 가파른 계단에 서보니 본인이 기억하던 높이가 아니란다. 너무 높고 가팔라서 학교 다닐 때 덜덜 떨면서 다녔다는데 그 앞에 서서 어이없어했다. 또, 빌려보던 만화방에서 이미 갖다준 책이 반납되지 않았다고 책을 빌리러 갈 때마다 눈치를 줬다던 만화방 주인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살던 때는 없었던 일본영사관 앞의 소녀상에 가서 소녀상을 둘러보고 사진도 찍고 왔다. 지금은 헐리고 없는 대형가전제품 판매장을 보고도 이야기가 많았다. 아들의 기억은 누나 MP3만 사주고 제 것은 사주지 않은 걸 기억하고 딸은 아빠가 자꾸 잃어버리고 또 샀던 디지털카메라를 기억하고, 나는 그 집의 VIP로 직원들이 우르르 나와서 깍듯이 인사하던 기억을 했다.

한 가족이 이사 나왔던 동네를 다시 찾아갔지만, 서로의 기억은 달랐고 서로의 추억도 달랐다. 같은 대상 같은 상황에서도 꼬맹이와 사춘기 소녀, 그리고 보호자였던 어른의 기억이 다를 수밖에 없음이 당연하겠지. 그나마 좋아하던 음식점이 없어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주고 추억할 풍경이 남아 있어 준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머지않아 다시 왔을 땐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리가 기억할만한 그 무엇이라도 남아 있길 바라본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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