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정 시인·수필가

바람이 분다. 사시사철 불어오는 바람, 우리는 늘 바람 속에서 살고 있다. 따스한 산들바람에 봄이 오고, 습하고 더운 남동풍이 여름을 몰고 온다. 남쪽에서 부는 선들선들한 건들마가 가을을 예고하고 차가운 북서풍이 불면 벌써 겨울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이렇게 계절마다 다른 바람이 불어 피부로 직접 바람을 맞는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그 바람에 순응하게 된다.

봄바람엔 무언가 가슴이 설레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면 왠지 쓸쓸한 고독감을 느낀다. 여름 태풍이나 겨울의 매서운 바람에도 나름 적응하고 단련이 되어 간다.

사물에 대한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우리 한글로 해, 달, 별, 구름, 비 등 자연환경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듯이 바람에 대한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보면 아주 흥미롭다. 부는 시기나 방향, 바람의 세기에 따라 꽃바람, 꽃샘바람, 실바람, 하늬바람, 건들마가 있는가 하면, 왕바람, 칼바람, 강쇠바람, 피죽바람, 마파람, 높새바람, 회오리바람 등 여러 가지 바람을 만날 수가 있다. 이렇게 세밀하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바람이 우리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절과 상관없이 시시때때로 우리를 흔드는 삶의 바람에도 우리는 흔들리며 적응하며 살고 있다. 어느 때는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부는가 하면 느닷없이 매서운 된바람이 생을 후려쳐서 다시 일어설 기력조차 없을 때 부드러운 실바람이 가만히 달래주기도 하니 그렇게 바람 속에서 울고 웃으며 생을 건너간다.

벌써 11월이다.

성급하게 다가온 가을이 산과 들, 사람의 마음조차 온통 불게 물들여 놓고 꼬리를 감추려 하고 있다. 이 시기를 놓칠세라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 겨울을 예고한다. 이때쯤이면 또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아쉬움에 사라져 가는 가을의 꼬리를 자꾸만 붙잡고 싶어진다.

습관처럼 새벽산책길에 나서면 벌써 달라진 공기 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조용한 침묵을 지키고 무성하던 잡초들도 찬 서리에 풀이 죽어 들길을 훤하게 넓혀 놓았다. 그 풍경 속에서 직립의 보행으로 뚜벅뚜벅 발자국을 찍으며 걷는 내 모습은 덩두렷하게 살아 움직이는 승리자의 모습이라고 잠깐 허풍을 떨며 두 팔을 흔들고 씩씩 하게 걷는다. 하기야 여태껏 살아오면서 숱하게 모진 바람을 맞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대견하지 아니한가.

바람이 분다. 나의 자만심을 탓하는 듯 길 끝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찬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그러나 이제 두렵지 않다. 외투 깃을 세우고 걷는다. 저 바람 속으로...,   김해뉴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