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적 근대가 시작된 도시 파리
 반군 1400명 대포로 진압한 나폴레옹
 파리를 피로 물들게 한 '프랑스 혁명'
"역사의 흉터 그대로 남은 도시가 파리"



서양사학자 주경철 서울대 교수가 쓴 <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역사>는 여행 안내서라기보다는 파리를 꿈꾸게 하는 책이다.
 
파리는 세계사의 도시다. 근대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됐다면 세계사적 근대가 시작된 도시가 파리다. 세느강 위쪽은 파리 우안, 아래쪽은 파리 좌안이라고 불리는데 파리 좌안에 대학가가 있다. 12세기부터 교수와 학생들이 파리 주교의 통제에서 벗어나 좌안에 정착하면서 학문과 사상의 지구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만든 좌파들도 이 좌안에서 많이 나왔다. 계몽주의 사상의 슈퍼스타인 18세기 볼테르는 아예 파리 좌안에서 태어났다.
 
여기에 판테온도 있다. 판테온은 혁명 정부가 국가 위인들에게 헌정한 명예의 전당, 무덤이다. 물론 여기에 '그는 우리를 위해 자유를 준비했다'는 헌사와 함께 볼테르가 묻혀 있다. 이런 헌사는 우리를 언어적 감동에 젖게 만든다. 도시의 품격과 시민의 격조를 느끼게 한다.
 
판테온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곳이다. 대사상가 볼테르는 루소와,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에밀 졸라와 같은 방에 누워 있는데 이들은 살았을 때 서로를 증오했다고 한다. 영령들은 원치 않겠지만 시민들이 그들의 주검을 그렇게 배치했다. 신(神)급의 위대한 인물이 된다는 것은 생전의 감정을 넘어서야 하는 어려운 자리인 것이다. 이러한 삶과 죽음에 얽힌 녹록잖은 종횡의 좌표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수놓인 도시가 파리다.
 
철학자 헤겔이 '말 위의 세계정신'이라고 표현했던 나폴레옹을 빼고는 파리를 말할 수 없다. 나폴레옹은 대단히 이율배반적인 인물이었다. 왕당파에 붙으려다가 아주 우연히 혁명파에 가담한 그는 왕당파 반군 1400명을 파리 시내에서 대포를 쏴 무자비하게 진압한 이후 권력에 진입하게 된다. 혁명 시대를 권력욕으로 굴절시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의도를 볼 때는 전 근대적이었으나 결과적 측면에서는 근대적이었다. 그의 대단한 욕망도 이미 근대로 향한 시대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는 하찮은 것이었을 게다. 여하튼 그의 시대에 파리는 중세 잔재를 걷어치우고 새로운 근대 공간으로 탄생했다.
 
1848년까지 프랑스 혁명은 퇴행과 전진을 되풀이하면서 엎치락뒤치락 전개됐다. 파리는 피로 물들었다. 파리 최초의 궁전이라는 콩시에르주리 벽에는 단두대 이슬로 사라진 280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바스티유 광장 7월 탑의 지하에는 1830년과 1848년 혁명 때 희생된 이들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역사의 몸살을 송두리째 앓았던 그대로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 파리라는 것이다.
 
이 기나긴 근대 혁명의 시대에 낭만주의 음악이 만개했다. 현란한 기교의 비르투오소 리스트, 신비로운 깊이와 위대한 음악의 슈만도 결국은 프랑스가 유럽에 파급한 시대 정신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쇼팽은 폴란드에서 유럽 문화 수도 파리로 건너와 피아노 흑백 건반으로 아득하고 아찔한 시를 썼다. 몰리에르는 웃음으로 인간의 악덕을 비판하고 조롱한 17세기 극작가였는데 근대 혁명기인 1844년 그를 기리는 분수가 만들어졌다. 왕이 아닌 인물을 기념한 첫 사례였다고 한다. 시대 정신의 열기와 확장 속에서 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문화는 도시 파리를 만들었다.
 
파리는 기원전 시대에 로마에 대항한 갈리아의 지도자 베르생제토릭스의 동상도 세워 그의 전설을 전하고 있다. 문화, 역사, 시대정신이 촘촘히 어우러진 파리를 일별하면서 역사와 문화, 기념으로 깊어지는 부산을 꿈꿔보기도 한다.
 
부산일보=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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