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애순 수필가

25층의 거대한 시멘트 덩치도 휘몰아치는 겨울 밤바람에는 몸살이 난 듯 '잉잉' 소리를 내고 있다. 베란다 창틈 사이로 들어오려 다툼하는 바람들이 산귀신들의 혼령인 양 귀신소리를 낸다. 산자락을 잘라 지은 아파트라 죄를 짓고 사는 기분이다. 밖의 광란과는 달리 방안은 평온하다.

결혼을 앞둔 어느 해 겨울, 우리는 그해 12월의 매서운 밤바람을 아무 보호막 없이 맨몸으로 부대껴야 했다. 남편과 나는 결혼을 앞두고 신혼살림을 차릴 방을 얻으러 다녔다. 12월 서울의 밤은 차고 매서웠다. 장남으로 태어나 동생들 공부시키느라 제 몫으로 결혼 자금도 변변히 준비해 두지 못했던 그는, 변두리에 방 하나 얻을 형편밖에 안되었다.

퇴근 후 우리는 플래시 하나를 손에 들고 전봇대와 담벼락에 붙은 '방세' 광고지를 찾아 다녔다. 언 땅은 나의 발바닥을 거부하듯 딱딱하고, 하늘은 칠흑처럼 어둡게 내려앉아 있다. <방 한 칸에 월세 OO>라는 글씨를 찾아 플래시를 비추며 낯선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면서 불편함 없는 큰 집에서 자라온 내가 어둡고 비좁은 이 골목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겁이 났다. 찬바람은 내 마음을 외면하듯 매몰차게 나의 볼을 때린다. 바람이 거세지자 그와의 힘겨웠던 갈등이 떠오른다.

장남에다 가진 것이 너무 없다고 다시 생각해 보라는 친정 부모님의 우려, 단칸방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할 수 있겠느냐며 다짐하듯 물어온 그의 단호한 말, 한 칸이면 됐지 어떠냐고 겁 없이 대답했던 나였다. 그런 내가 두려워졌다. 눈에서는 시린 바람을 못 이겨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는 "춥지?"하며 내 손을 꼬옥 잡았다. 그의 손은 항시 따듯했다. 추위를 못 견디는 나의 손은 항시 그의 주머니 안에 있었다. 두꺼운 외투에 부츠까지 신고도 발이 시려 동동거리는 나와는 달리, 방한이라곤 하나도 안 된 옷을 입고 있는 그는 전혀 추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의 안에 자존심이 꽁꽁 뭉쳐 추위를 막아내고 있는 것 같다.

한 칸짜리 월세 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린 며칠을 걸려 어둔 밤길을 밝혔다. 아무렇게나 쓰인 서툰 글씨체가 이 동네를 더욱 빈곤하게 보이게 한다. 빈손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슴푸레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들이다. 목은 자꾸 외투 속으로 움츠러드는데 그의 손은 더 뜨겁게 나의 손을 꼬옥 쥔다. '내 곁엔 이 사람이 있구나' 믿음이 생기자 까만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인다. 우린 잠시 추위를 녹이려 찻집을 찾았다. 불빛을 쫓아 찾은 곳이 동네 허름한 찻집이다. 다방도 아니고 음식점 같은 분위기로 차를 팔고 있는데 그 분위기가 마치 우리의 가난한 처지와 비슷해 보여 싫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연인끼리 시내 멋진 곳을 안 가고 이런 곳엘 왔느냐며 아픈 곳을 찌른다. 차 한 잔이 나오자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밤바람이 몹시 차지? 그래, 미안하다. 지금은 월세 방으로 시작 하지만 머지않아 우리 집 갖게 해 줄게. 너무 실망 하지 마."

그의 눈에는 남다른 각오와 다짐이 서려 있었다.

차 한 잔에 몸을 녹인 우린 다시 어두운 골목으로 나섰다. 종전까지 음침하고 썰렁하게만 느껴졌던 골목길이 나지막한 집채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우리도 이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얽었던 마음을 푸니 골목에 대한 경계의 마음이 사라졌다. 큰 거리로 나오자 밤바람은 여전히 우리를 삼킬 듯이 달려들었지만 따뜻한 그의 손에 담긴 나의 손은 그의 체온을 더 느끼려 손안에서 꼼지락거렸다.

그해 겨울, 우리에게 매몰찼던 차가운 밤바람이, 지금은 베란다 창밖의 풍경으로 와 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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