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재규 김해뉴스 독자위원·인제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진영 양지마을에 둥지를 튼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집에서 채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얼중학교가 있다. 아들 '한빛'의 동생이 태어나 아들이면 '한얼', 딸이면 '단비'라는 이름을 예약해두었기에, 평소 학교 앞을 지나다니며 '이 학교는 아마도 상당한 교육철학과 가치관을 지닌 분이 설립했을 거야'라며 혼자 상상을 하곤 했다.

마침 지난달 29일 오후 4시 진영문화센터에서 (사)경남향토사연구회 주관으로 한얼중학교 총동창회가 열렸다. 동시에 강성갑 선생 기념사업회 '한얼학교 설립자 강성갑 선생 학술세미나'도 마련됐다. 필자는 우연히 소식을 접하고 시간을 내 참석했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학술대회는 (사)경남향토사연구회 송종복 회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제1발표는 '해방공간 강성갑의 기독교 사회운동'으로 연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홍성표 박사가, 제2발표는 '강성갑 선생의 학문·교육적 사상'을 주제로 부산대 사학과 이종봉 교수가 맡았다. 토론에는 밀양고 손경순 교장, 의령문화원 이종록 이사가 참여했으며 종합토론은 강성갑기념사업회 심용주 상임부회장이 맡아 진행했다.

강성갑 선생은 1912년 6월 21일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웅곡마을에서 태어나 의령보통학교를 다니다 마산 창신학교로 전학했다. 이어 마산공립상고, 연희전문, 일본 동지사대를 마쳤다. 졸업 후 부산초량교회와 진영교회에서 목사로 봉직했으며, 부산대 교수로 잠시 임용됐으나 1년 만에 사임을 했다. 그리고 진영으로 돌아와 교육 활동에 전념하다 1950년 8월 2일 공산주의자란 누명을 쓰고 불법 연행돼 낙동강 수산교에서 총탄을 맞고 피살됐다.

선생은 먼저 복음중등공민학교를 설립·운영하면서 자신의 교육이념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한얼중학교라는 정식학교를 설립했다. 학교 명칭은 '한얼'로 정하고, 교육이념은 덴마크 그룬트비의 교육이념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는 삼애정신으로 삼았다.

선생은 '자기만을 위하는 자기 본위의 사상과 행동은 그 민족이나 국가를 멸망으로 이끌었기에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 해방된 오늘 조선은 조국을 위해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 몸과 생명을 바쳐 희생의 제물이 되려는 인물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우리 교육은 명백한 목적과 방향도 없이 그저 막연히 가르치고 배운다는 맹목적 교육을 하는 중에 '쟁이'를 천시하는 사회 풍조로 쓸모없는 고등유민을 길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생은 고등유민만을 길러내는 맹목적인 교육을 비판하고 '쟁이'를 길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얼중학교 교사 신축과정이 그의 교육실천과 관련한 '노작교육'이었다. 학교에는 성냥공장, 기와공장, 목공장 등이 있었고 기술자들이 직접 학생들을 지도했으며 학생들이 기술자들을 반드시 '선생님'으로 부르게 했다. 또한 기술자들의 월급도 교장인 자신의 월급과 같이 지급하며 차별하지 않았다. 선생은 "훌륭한 기술자는 이력서를 가지고 다니며 남에게 머리 숙여 예속되기를 애원하지 않아도 된다"며 "모든 사람이 반드시 자기의 생존을 위해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사람이 한가지씩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술대회에서 내가 이해한 강성갑 선생은 이 나라의 진정한 참교육자이자 종교인으로서 실사구시의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강성갑 선생에게서 조선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사표였던 남명선생의 모습이 겹쳐졌다. 선생이 살아 직접 이 나라 교육정책을 수립·집행했다면 오늘의 우리 교육이 과연 이랬을까 하는 강한 아쉬움과 함께.      김해뉴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