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혜경 김해문인협회 회원

참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반나절 동안 견디던 통증이 나를 짐 부리듯 털썩 내려놓는다. 달래주려고 어설피 손댔더니 더 열불을 낸다. 오늘은 터뜨리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언제부턴가 오른쪽 엄지발톱이 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양말을 벗어보니 발가락 끄트머리가 벌겋게
부풀어 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겨 파고드는 발톱을 삼각형으로 잘라내고 소독하는 것으로 버티었는데 결국 동티가 났다.

"어허 우짜노. 마취하면 좀 아플낀데."

의사 말이 끝나자마자 뚝딱 치료가 끝났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걸리적거리던 유치를 빼던 유년의 기억처럼 골칫거리가 해결된 양 속이 시원하다. 약만 먹어도 되느냐는 내 질문에 주사 맞고 가라는 의사의 엄중한 한마디가 날아온다.

십여 년, 헐렁한 슬리퍼를 신고 다니다가 계단을 헛디뎌 발목을 삔 적이 있었다. 괜찮아지겠거니 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퉁퉁 부어올라 병원을 찾았다. H 병원장이 이리저리 눌러보더니 뼈는 성하니 찜질하면 괜찮아진다는 처방을 내렸다.

그 흔한 엑스레이를 찍지도 않으니 절뚝거리며 간 환자로서는 좀 싱겁기도 했다. 게다가 주사, 약 처방이 없이 대수롭지 않다고 진단이 내려지고 진료비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작은 상처에 엄살 부리는 손자에게 "호" 불어주는 격이었다. 자랑삼아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면 요즘 세상에 그런 의사도 있냐면서 눈을 크게 뜬다.

이 웅숭깊은 사람은 오래된 동네에 붙박이 같은 H 병원 주인장이다. 의사라고는 혼자이니 병원장은 겅중겅중 진료실과 처치실을 바삐 오간다. 스무 명 남짓 앉을 만한 대기실에도 환자들이 꽉 차는 날은 거의 없지만 단골 환자 발길은 꾸준하다. 그의 진찰법은 환자를 두렵지 않게 하고 통증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어지간한 병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병원장의 노련한 칼솜씨(?)와 말솜씨에 울먹일 새 없이 치료는 끝이 난다.

부모복이 반복이라고 한다지만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도 큰 복이다. 자식을 키우면서 의사 도움이 절실할 때가 많았다. 아기가 놀랄까 봐 자신의 손으로 청진기를 데워서 진찰해주던 의사, 불덩이가 된 아이를 업고 무작정 병원에 들어서면 가운을 벗다가도 다시 입던 의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그들은 차가운 청진기와 메스를 따스하게 데울 줄 아는 의사였다.

이익보다 환자의 건강을 우선하는 의사는 자신도 건강하리라. 미량의 방사능과 소량의 항생제도 조심스럽게 쓴다는 광고가 없어도 환자들이 몸으로 느낀다. 그런 병원에서는 의사도 환자도 행복하다. 의사를 믿는 환자는 치유도 빠르다고 한다. 나는 H 병원장이 환자에게 믿음을 주는 건강한 의사임을 의심치 않는다.

받아온 약봉지에는 알약 두 알이 다정히 들어있었다. 벌겋게 성을 내던 나의 발가락은 삼 일만에 활기를 찾았다. 의사 말로는 재발할 수 있다고 했으나 믿고 편히 찾아갈 병원이 있어 걱정스럽지 않다.
사람은 온기가 있어야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몸이 아프면 오죽할까. 환자에게 믿을만한 의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이다. 묵은 정으로 살아가는 우리 동네 풍경 속에는 붙박이 의사가 진료하는 H 병원이 고향 느티나무처럼 묵묵히 서 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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