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하구둑 생기기 전 갯벌지역 도로 생기면서 나루터도 사라져
강 사이에 두고 도시와 농촌 대조, 마을 뒤편 각성산에 성 흔적 남아
마을 상징 닭바위도 도로에 밀려 "산단 개발되면 정든 이들과 이별"

▲ 월촌마을회관.
남해고속도로에서 낙동강 상류쪽을 바라다 보면 두 가지의 대조적인 풍경을 만나게 된다. 주택 및 상업시설이 즐비한 부산 북구의 모습과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대동면의 농촌풍경이 그것. 김해시의 동쪽에 위치한 대동면 월촌마을(월당마을)에 가려면 대동면 조눌리를 지나 낙동강 상류쪽으로 한참을 더 가야 한다.
 
대동면의 초입에서 월촌마을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자동차로 20여 분,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비슷한 풍경을 수없이 지나야 '한국의 덴마크'로 불리는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
 
대동면 월촌리에는 두 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월촌마을(월당마을)과 평촌마을. 두 마을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별개의 법정리였다가 지난 1914년 월촌리로 통합됐다.
 
▲ 나루터가 있었던 월당진 주변의 모습. 나룻배 대신 관광용 어선 한 척이 정박해 있다.
월촌마을 일대는 낙동강하구둑이 생기기 전까지 바닷물의 영향을 받는 갯벌지역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마을의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리는 마을사람들이 많았는데 바닷고기를 반찬 삼아 생활하던 때도 있었다.
 
1980년대까지 낙동강변 제방 아래에 있었다는 월당진이라는 나루터에 대한 추억도 월촌마을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기억이다. 월당진은 중·서부 경남 일대의 역로였던 자여도를 부산~밀양 구간의 황산도로 이어주는 마지막 나루터였다.
 
"배고팠던 시절 이야기지. 산에서 나무해 밥해 먹고 낙동강에서 멱감던 시절…. 불과 30년 된 일인데 아주 오래된 일 같아."
 
육십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차청식(60) 씨는 나루터가 있었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 건너편에 서는 양산장에 가려고 나룻배를 타는 이들이 많았지. 하지만 도로가 생기고 이용하는 이들이 줄면서 나루터도 사라진 거야. 여기 폐가처럼 방치돼 있는 건물 봐. 그때 번성했던 식당이야. 잉어회를 먹으려고 많은 이들이 찾아왔었지. 술판도 종종 벌어졌고. 지금은 저렇게 방치돼 있지만…."
 
차 씨의 설명에서 옛날 모습이 조금씩 그려졌다.
 
▲ 문수암.
문수암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은 세 박자를 갖추고 있었다. 가까이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있었고 집들 주변 농토엔 비닐하우스가 가득했다.
 
월촌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과일과 채소를 키우며 생계를 이어오고 있다. 대파와 당근, 수박, 딸기, 토마토, 배추, 시금치 등이 주 생산품으로 비닐하우스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뒤부터는 농번기라는 말이 사라졌다고 한다. 한겨울 추운 날씨였지만 비닐하우스 안은 따사로운 봄기운으로 가득했다.
 
낙동강 제방 너머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제방을 중심으로 4대강 공사가 한창인데 자전거도로 및 주민휴식시설 공사가 막바지 단계였다.
 
낙동강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이곳 주민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40년 동안 창고 하나 짓기가 힘들었다는 주민들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급격히 벌어지고 있는 발전의 격차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 문수암에서 내려다 본 월촌마을의 모습. 산과 강 마을이 어우러져 있다.

월당마을이 자랑하는 또 다른 풍경은 마을 뒤편에 위치한 각성산이다. 이 산을 정면에서 바라다 보면 기와집을 연상하게 된다. 평행사변형 모양의 모습이 기와집과 꼭 닮아 있다. 산 정상에는 각성이라 불리던 성의 흔적이 있으며, 옛 사람들은 물속의 달섬으로도 불렀다는 후문.
 
몇 년 전 마을과 각성산 사이에 중앙고속도로 지선이 생긴 것은 마을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그 덕에 양산으로 가기가 한결 수월해졌지만 도로가 산을 가리는 형국이 됐고, 옛 추억이 가득한 나루터도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장학수 월촌리 이장은 "마을을 상징했던 닭바위라는 바위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개발로 인해 삶은 나아졌지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고 말했다.
 
월촌마을 사람들은 앞으로 찾아올 마을의 변화에 대해 불안감을 토로하고 있었다. 마을 일대에 대동첨단산업단지 조성이 기정사실화되면서 개발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한 마을 주민은"여유롭지 않은 삶이었지만 홍수 걱정 안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옥토였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수대째 함께 살아온 마을사람들과 이별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요즘은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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