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열 소설가

어느 대학 교수의 강의 시간이었다. 그는 자식의 진로를 부모가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열변을 토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부모가 자신이 못다 이룬 꿈길을 아이들로 하여금 걷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그의 이야기는 맞다. 그만의 이야기겠는가, 지도층 인사들의 대략 공통적인 의견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다르다.

자식의 앞날에 대한 부모의 열정! 자식 교육 잘하게 시켜 호의호식하며 살겠다는 것도 아닌데 당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는 대한민국의 부모들, 죽기로 돈을 벌어 죽으라고 교육을 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을 보내고 과외 공부를 시키는 것은 기초를 다져 중학교에 가서 공부를 잘하게 하기 위함이다. 중·고등학교를 진학해서도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닦달한다.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서다. 대학에 가면 또 스펙을 쌓고 자격증을 딸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한다. 

하느님께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식들로 하여금 수많은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식들이 좋은 직장을 갖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고, 자식의 좋은 직장을 구해주기 위해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모는 그렇게 울어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또 직장을 구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직장을 어렵사리 구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그만둬버린다면 부모는 뒤로 나자빠질 것이다. 그런데도 자식의 진로에 대해 관여하지 말라고? 턱도 없는 소리다.

나는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만 두 녀석이 있다. 둘의 성격이나 천성은 대조적이다.

큰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문과냐 이과냐를 두고 고민하던 아들이 문과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연산에 자신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보험회사에 취직해 보험 업무를 보면 재능에 맞을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난 일언지하에 반대했다. 이유를 묻는 아들에게 나는 부모만이 알 수 있는 녀석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들은 첫 돌이 되기 전에 걸음마를 시작했다. 남자치고는 빠른 감이 없지 않았다. 그만한 나이에는 누구나 그러하듯 나는 녀석이 귀여워 죽을 지경이었다. 안고 있거나 무릎에 앉혀 놓고 같이 TV를 보고 싶었다. 그런 나의 작은 소망을 녀석은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1분을 가만히 앉아 있지도 안겨 있지도 못했다. 그런 아들의 일과는 오로지 서랍 속의 물건들을 모조리 쏟아 놓고, 물고 뜯고 노려보기. 온종일 우는 법도 없었다. 장난감을 사주면 역시 물고 뜯고 노려보고 깔고 앉고. 결국 그 장난감은 얼마를 버티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곤 했다. 걸음마를 하기 전 기어 다닐 때부터 그랬다.

엄마는 서랍장마다 문고리에 신발 끈을 동여매서 열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아내의 결정을 존중했는데 아들이 난장판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위험해보여서이었다. 그때 나는 녀석이 커서 어른이 되면 기계를 다루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보다 사물을 좋아하는 까닭이었다. 지금은 부산교통공사에서 기관사로 근무하고 있는 녀석은 기계공학과를 선택했고 대학 시절 두 번의 장관상을 받았다.

작은 녀석도 형과 같은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녀석은 형처럼 이과를 가겠다고 했다. 나는 녀석의 결정을 역시 일언지하에 반대했다. 작은 녀석은 장난감으로 10분을 버티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한시도 사람과 떨어져서 있지 못했다. 그저 엄마를 약 올리고 매달리고 괴롭히고.

나는 학자들이 내는 논리를 잘 모르지만 부모로서의 자식은 안다. 사람은 사고가 생겨나면서부터 좋아하는 일, 적성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있지만 그 기준은 변한다. 지금 좋아 보이는 일이 시간 지나고 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자식, 우리의 자식들에게 의식이 생기기 전의 천성을 바탕으로 진로를 선택해주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부모는 아이의 천성을 살려 인생의 물꼬를 터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값어치 있는 일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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