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병연 쾌유 염원 기존 설과 판이
화면에 인왕봉·사도세자·세손 거처 배치
왕위 상징 인왕봉 등정 순서 숨겨 놓아
영조·노론 강경파 의도·욕망 대변 해석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의 걸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 대한 대단히 파격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기존에는 비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인왕산 모습을 통해 겸재가 40년 인연을 이어온 시인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담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노론 강경파의 입장에서 어진 임금(仁王, 영조)이 비가 그치고 이제 본연의 얼굴빛(마음)을 회복할 거라는 정세 보고를 담은 그림이라는 해석이다.
 
그림 해석에는 복잡한 정치 상황이 깔려 있다. '인왕제색도'를 그린 시점은 1751년 5월, 영조 27년이었다. 그 2년 전, 영조는 15세의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사도세자는 소론과 합세해 노론을 일일이 내쳤다. 그러나 어떤 노론이던가. 노론은 경종 때 신임옥사(1722)의 참화까지 감당하면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적극 밀어 옥좌에 앉힌 세력이다. 이런 노론을 대리청정으로 전권을 쥔 사도세자가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론은 세력 결집을 하면서 조정을 흔들어대고, 사도세자는 앞뒤를 재지 않고 밀어붙여 정국은 그야말로 경색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의 계기가 주어졌다. 영조의 고민이 깊어지던 중 마침 1750년 사도세자의 첫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영조는 그 이듬해인 1751년 서둘러 손자를 세손으로 책봉하면서 정국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요컨대 새로운 후계 구도의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인왕제색도'는 이런 영조의 의중을 재빨리 간파한 노론 강경파의 정치적 전망과 욕망을 담은 그림이라는 것이다.
 
화면 중앙의 비에 젖어 미끄럽게 보이는 시커먼 인왕봉은 아직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영조의 마음을 상징한다. 주목할 해석의 포인트는 화면 하단에 있는 집 3채다. 그중 허술하게 그린 오른쪽 2채는 허술한 조정과 사도세자를, 가운데의 작은 1채는 책봉된 세손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림 속 길을 따라 인왕봉, 즉 왕위에 오르는 순서를 보면 놀랍다. 봉우리에 오르는 길은 사도세자-세손-영조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세손이 사도세자보다 왕위에 더 가깝다는 것을 숨긴 거라고 한다.
 
당시 노론 강경파는 인왕산 근처 장의동에 사는 안동 김씨 일파, 즉 '장동 김씨'였다.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절개, 김수항·김창집 부자의 충절, 김창협·김창흡 형제의 학문과 문장을 인정받으며 장동 김씨 집안은 누대에 걸쳐 조선 후기 최대 명문가였다. 겸재가 이 집안과 인연을 맺은 것은 1711년 김창흡의 금강산 여행길 동행 때다. 이후 겸재는 이 집안의 화가가 되면서 조선 회화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장동 김씨는 공재 윤두서도 물망에 올렸는데 결국 더 출중하다는 겸재를 택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 장동 김씨 세도정치의 온상이 인왕산 동쪽 골짜기의 별장 청풍계였다. 노론 강경파의 정치적 교육장이었다. 겸재는 이 청풍계를 가장 많이 그렸다. 10여 점이나 이상향처럼 그렸다. 표황 강세황이 겸재의 걸작, 득의의 작품이라 평한 '하경산수(夏景山水)'도 청풍계를 그린 것이다. 겸재의 정치적 지향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겸재를 노론의 화가라고 칭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조선후기 문화의 시대적 특징, 한국문화의 황금기를 말할 때 조선중화사상에 근거한 진경시대를 칭하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노론에 치우친 견해다.' 즉 진경시대는 조선후기 문예계 흐름을 대표할 수 없는 용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노론 정파의 겸재뿐 아니라 남인·소론의 정치관을 표현한 표암, 그리고 여타 문예인의 사회 인식과 정치관이 혼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반 백성들이 주도한 판소리를 비롯한 문예의 부흥, 새로운 언어 의식을 더더욱 누락해서는 안 되는데 이런 다양한 흐름을 정파적인 '진경시대'라는 용어로 다 싸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조선후기 이래 근현대 한국사에는 기득권의 이름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는 노론의 큰 맥이 있다. 그것을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는 관점에 저자는 서 있는 것이다. 
 
부산일보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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