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에서 카투사에 근무하던 시절의 김동창씨.
1932년 1월 나는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은흥리라는 빈농가에서 6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두 분의 형님과 누나, 두 동생 6남매다. 주곡이라고는 보리, 감자, 귀밀이 주산이고 일 년 농사를 지어도 반 년정도 밖에 먹을 수 없었다. 봄이면 초근과 목피로 겨우 연명했다. 굶은 날이 먹는 날보다 많은 빈농에서 태어났으니 교육이라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참다 못한 큰 형님께서 감자만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심심산골로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화전을 일궈 농토를 확장하고 먹을 것을 찾아보자는 의견이었다.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야반도주 하다시피해 함경남도 풍산군 천남면 원흥이라는 백두산 밑 화전지대로 이주했다. 다행히 형님은 운이 좋았던지 해가 갈수록 농토를 확장 개간해 식구의 먹는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일본은 재정조달이 어렵게 되자 산골까지 아편재배를 장려했다. 당시 아편은 약재의 필수 원료로 중국에서 대량 수입하고 있었고 일본의 자금조달에 일조했다.
▲ 카투사 시절 동료들과 함께한 김동창씨.
우리 집도 아편재배를 강요받았고 전량 수탈됐다. 당시 아편 한량은 작은 성냥갑만했었는데 가격으로 수 백 만원이 호가했다. 형님은 재배하던 아편을 조금씩 빼내 중국인에게 밀매했고 누이와 동생의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그 덕에 나는 20여리 떨어진 서당에 입학했다. 총 학생 수는 30여명.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공부 제일 잘하는 총명한 아이로써 전교 1등을 내놓는 일이 없었다.

그럭저럭 전쟁말기까지 수 년간 아편 재배로 많은 돈을 모았다. 그러다 형님께서 동생들의 공부를 위해서 도시로 나가 살자고 제안했다. 60여리 떨어진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괴성리 면소재지에 만여 평되는 밭과 6칸의 큰 기와집을 마련했다. 큰 형님께서 교육을 위해 아버지, 어머니, 누님 나와 동생 여동생을 먼저 이사시켰다. 땅 중 3천여 평은 곡씨와 위씨라는 중국인에게 소작을 주었던 상태다.

1943년도 일제하에 우리 마을에는 초등학교라고는 일본인학교 하나 밖에 없었다. 한국인이 이 학교에 입학하기에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3월에 있는 보궐시험에 1,2등만 하면 입학할 수 있었다. 보궐입학시험에서 나와 동생은 당당히 1등으로 초등학교 입학의 영광을 안았다. 형님은 너무나 기뻐 동네잔치를 베풀었다. 형님의 교육열에 감동하여 국민 학교 중학교 내내 수석을 유지하였다. 어려서부터는 글씨에 재능이 있다하여 명필로 칭찬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를 마칠 즈음 면사무소에서 전교 우수 학생 중 글 잘 쓰는 졸업생 1명을 선발했는데 행운은 나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면사무소 호적계의 면서기로 발탁돼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경사 중에 경사였다. 온 동네에서도 우리 집을 우러러 보았다.

행복도 잠시 우리 가정에도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38선 남쪽엔 미국이 진주하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한국은 허리 잘린 두 동강이가 되었다. 1946년 북한에는 소련의 배경을 등에 업고 김일성이 들어와 통치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토지개혁법이다. 과거 지주로부터 소작농으로 경작하던 모든 땅은 몰수하고 소작인에게 분배, 소유하도록 한다는 법이다. 즉 사유재산의 몰수인 것이다.

우리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작농이었던 중국인에게 땅을 모두 빼앗겨버린 것이다. 나도 면사무소에서 탄광으로 보직이 강제로 이동됐다. 실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일시에 가산은 몰락하고 기세는 기
▲ 부인 이기남씨와 함께한 김동창씨.
울어졌다. 그래도 좌절할 수 없었다. 나는 봉급을 가사에 보태었고 큰 형님은 곧 소장사를 시작했다. 함경남도 북청에서 단천을 거쳐 풍산으로 머나먼 길을 소를 끌고 다니며 장사하여 생계는 무난히 유지했다.

공산주의 정치는 날로 악랄해져 현물세라는 명목으로 수확량을 전량 수탈해 농촌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과거 소작인으로 있던 사람들이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지주들을 핍박했다. 우리 가정에도 처절한 고통과 시련이 먹구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많은 땅을 빼앗기시고 화병으로 고생하시다가 1949년 봄 어느 새벽 아무 말 없이 가출하셨다. 온 가족이 애타게 기다리던 중 이듬해 겨울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느 두메산골에 수양하러 갔다 오신 것이다. 이유인 즉 금년에 죽을 팔자이니 액땜을 위해 피신하고 왔노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철학적 소질이 많으셨다.

하지만 운명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었던가? 눈이 지독하게도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그 날은 북한의 대의원 총 선거가 있었고 투표 장소는 내가 일하고 있는 광산이었다. 그 날 새벽, 목멘 소리로 나를 찾는 누군가가 왔다. 아버지가 산중에 쓰러져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산골길을 따라 오막살이집에 다다르니 아버지가 고통을 느끼며 누워계셨다. 나는 나무 썰매를 만들어 그 위에 아버지를 눕히고 끌었다.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시간은 아버지의 죽음을 재촉하는 듯 했다. 살리기 위해 응급처치를 하려해도 선거일이기에 할 수 없었다. 죽더라도 투표는 마치고 가라는 상사들 때문에 답답할 노릇이었다.

북한식 투표는 이러했다. 찬성은 흰 투표함에 반대는 검은 투표함으로 넣게 해 모두가 흰 투표함에 넣도록 무언의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감히 검은 투표함은 넣을 수 없었다. 겨우 차 한 대를 얻어 아버지를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결국 별세하셨다. 같은 해 둘째 형님도 세상을 뜨셨다. 비운이 겹치고 겹쳤다.


정리 =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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