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애순 수필가

여행은 집을 벗어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다. 지인들과 1박2일 여행으로 집을 떠나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1박2일의 시간을 공유한다. 첫 날 일정을 마치고 밤늦도록 이어진 이야기와 음주 가무로 평소보다 늦은 시간까지 정신을 근근이 지켜내다 다음날 일정을 생각해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겨우 잠에 빠지기 시작한 이른 새벽, 모닝콜 음악이 수면을 방해하며 정신을 깨운다. 모닝콜의 주인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잠시 뒤 한번 더 음악이 흐른다. 그의 곤한 잠을 위해 대신 모닝콜을 꺼주고 싶다. 모닝콜이 한번 더 울린 다음에야 휴대폰의 주인은 잠결에 한마디 중얼대더니 폰을 끈다. 이제 끝나나 했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휴대폰의 벨소리가 희뿌연 어둠의 공기를 가른다. 늦은 잠자리로 한줌의 잠이 아쉬운 판에 모닝콜의 파음은 성가시다. 그 폰의 주인은 잠이 깨어 있었는지 서둘러 음을 죽인다. 
 
여럿이 함께 여행을 할 때나, 명절이나 큰일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자게 되는 경우가 있다. 새벽이 되면 단잠을 깨우는 모닝콜 벨소리가 여기저기서 자신의 집에서의 일상적 삶을 드러낸다. 폰이 주인을 따라 나와 어김없이 소임을 다한 까닭이다. 휴일만은 잠시 소임을 내려놓아도 되건마는 바보 같은 기계는 그것을 알아서 하지 못한다. 
 
어둠속에 울리는 모닝벨 소리에서 비애를 듣는다. 그 소리에 우린 부스스 잠을 털어내고 기꺼이 삶의 현장으로 나설 전투준비를 해야 한다. 농부가 밭을 갈러 나가자고 소의 고삐를 잡아끌어 내듯이 우리의 고삐를 잡아 일터로 끌어낸다. 모닝콜 기계는 흔들림 없는 반복으로 일체 봐줌이 없다.
 
모닝콜에 응답한 사람들은 일어나 또 하루를 시작하리라.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 못 마친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 아침밥을 지으러 주방으로 향하는 주부. 지난 밤 못 다한 일을 마무리 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터로 나갈 준비를 서두르겠지. 어떤 일을 하건 그들은 모두 한 사회의 일원으로 그 사회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모닝콜을 작동 시킨다. 잠자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순하게 그 소리에 협력한다. 사회에서 버티기 위한 서글픈 순종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닝콜 소리에서 비애를 듣는다. 세상에서 버텨내기 위한 처절한 약속이행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참으로 고달프다. 한병철 문화비평가는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성과사회 속에서, 우리는 누가 지배하지 않아도 스스로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신을 착취하고, 과잉행동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속하여 자유는 사라졌으며, 성과사회는 지배 없는 착취와 감독관 없는 강제로 스스로를 노동하는 존재로 추락시킴으로써, 결국 인간이 주체적 삶을 살지 못했다는 지적을 한다. 또한 성과사회에서의 낙오자는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에 시달리는 환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스스로 택한 자기착취지만 거대한 이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이 우리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이리라. 
 
현대인은 시간에 쪼들리고 속도에 쫓긴다. 여행은 잠시나마 시간의 수갑을 풀어내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살갑다. 좁은 공간에서 무장 해제된 낮은 숨소리로 함께 호흡하는 이 시간, 그들의 삶과 나의 삶에 소통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또 한 번 모닝벨이 울린다. 힐링의 시간만이라도 지친 영혼을 쉬라고 그들의 모닝콜을 대신 꺼주고 싶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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