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갑순 수필가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실재계는 아득히 멀리 있다. 라캉은 죽음만이 인간의 욕망을 해결한다고 했다. 주위에서 만나게 되는 전혀 예측되지 않던 죽음 앞에 당황할 때가 있다. 
 
'노인과 바다'를 쓴 작가 헤밍웨이는 지금의 내 나이 즈음에 좋은 작품을 더 이상 못 쓸 것이라는 중압감으로 죽음을 택한다. 그리고 '자기 앞의 생'을 쓴 프랑스 작가 로맹가리도 마흔한 살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가 발표한 작품마다 평론가들의 극심한 비평에 심적 고통을 못 견뎌 결국 자신의 입에 권총을 물고 방아쇠를 당긴다.
 
몇 해 전 노동자들과 고통을 함께하던 정치인의 자살, 우리들이 믿고 있었던 정치인, 특히 노동현장에서 발로 뛰며 그들과 고통분담을 함께했던 분이 유명을 달리해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드루킹 불법 자금 수수 의혹이 원인이었다. 또 행복 전도사 최윤희 부부의 죽음도 우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대중들에게 행복한 삶의 지침들을 강의하며 스스로 행복한 존재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열강하던 사람이었다. 그 덧없는 부음을 접한 일반 대중들은 과연 행복은 무엇인가에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삶도 지탱하지 못해 자살할 만큼 위기를 살아가면서도 타자들 앞에서는 실상과 다른 얘기들을 했으니···.
 
돈과 권력 뒤는 늘 시끄럽고 복잡하다. 돈과 권력을 위해서 양심과 겸손을 내려놓고 자신을 타인 앞에 홍보하기 위해 급급한 사람들, 돈과 권력을 가지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부도덕함에 일반 대중들은 환멸을 느끼고 힘이 빠진다. 종종 대기업의 총수 가족들이 또 온갖 구설수에 올라 있다. 극단적 갑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인간의 삶이 저렇게도 피폐해 질 수 있는 것인지, 어느 정도가 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귀감이 돼야 하는데 참 아쉽다. 개인의 욕망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타인에게 몹쓸 짓을 하고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있음이 나와 같은 서민들을 지치게 한다. 
 
원하는 대학을 졸업했건만 취직하기가 어렵고, 어렵게 취직을 해도 내 집 마련하기가 어렵다. 계속되는 야근에 지치고, 연이어 또 다른 경쟁자들이 나타난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도 아이를 키우기는 더 어렵다. 맞벌이로 밤과 낮, 종횡무진 달리다 보면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행복한 삶은 어디쯤 있는 것인지, 우리 삶의 완전한 실재계는 자꾸만 멀어진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자괴감을 가지며 삶에 대한 허무를 이길 수가 없다. 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최악의 죽음을 택하는 이들, 결코 죽음은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몸이라는 지층에 갇혀 있던 입자들이 다시 지구를 향해 흩어지게 되는 문턱일 뿐이다. 
 
타자와 세계를 위한 일에 동분서주하다 보면 '왜 사는지'에 대한 회의로 나만의 행복을 찾는 이들이 등장한다. 환상과 현실이 다름을 인식하고 진정한 개별적 자아로서 살아가기를 결심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꿈꾸는 '평범한 삶'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 욕망의 한계를 삶의 틈에서 경험하고 느낄 때, 우리 삶이 정답이 없음을, 개인의 다양함과 차이를 인식할 때, 적당한 포기와 협상이 가능하게 된다. 다시 말해 평범하다는 것이 가장 비법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수많은 포기와 좌절, 나만의 철학이 성립되기까지는 멀고도 아득한 길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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