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울하십니까? 돈 때문에 힘드십니까?" 그러시다면 "변기에 앉아서는 일단 시부터 읽읍시다."
 
김언희의 시집을 펼쳐들고 구구절절 츱츱츱츱 소리 내어 읽으면서 춥파춥스처럼 물고 빨아봅시다. 처음에는 똥오줌과 피고름과 시체와 섹스의 맛 때문에 "오한과 더불어" "하루를 구토로 시작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금방 뱀에 물린 당신의 얼굴"처럼 표지가 샛노란 시집이 "더더욱 샛노래지려고"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또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결국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맛"을 볼 수도 있겠습니다.
 
김언희의 시세계에서는 '피상적으로, 비겁하게, 비굴하게, 적당하게' 이런 언행들은 허락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정면으로, 극단적으로, 극명하게, 극렬하게' 이런 언행들은 세금처럼 필수적으로 납부해야 생존이 가능한 세계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뭘 해도 지루해서 미칠 것 같을 때나 지루해서 미칠 것 같은데 뭣 하나 할 일이 없을 때 그의 시집을 읽는 버릇이 생긴 것 같습니다. "네 역할은 의자야. 무대 위에서 무덤 대용으로 사용되는 의자, 알지?"하는 구절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살충제를 덮어쓴 벌레처럼 버둥거리면서.
 
몇 년 전, 어느 만남에서 그는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미리 써놓은 십 년 치의 일기"와 "미리 써놓은 백 년 치의 가계부를" 참아줄 수 있는 경지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위들, 누군가 하고 있으면 도저히 빤히 쳐다볼 수 없는 행위들을 지독하게 집요하게 추적하고 까발리면서 체득하게 된 것일까요? 그런데 그는 왜 늙고 병든 노모 앞에서는 "악혈에 젖은 눈자위"를 숨길 수 없었던 것일까요?
 
시적 포즈를 완전히 내던져 버린 그의 시가 나에게 시적 환상을 완전히 내던져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너무 매워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또다시 땡초를 베어 무는 사람처럼, 금방 파스를 떼어내어 벌겋게 부어오른 허벅지에 또다시 파스를 붙이는 사람처럼. 그를 읽다보면 내게는 너무나 시적인 그의 "생활의 국부를 회중전등으로 비추어 보는 병"에 감염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인간적 포즈와 인간적 환상을 깡그리 벗어 버려야 진짜 인간이 보이고(되고) 진짜 인생이 보인다(된다)!고 그의 시가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위해서건 살기 위해서건 하는 짓은 똑같은 이유"나 "히죽히죽 웃었는데도 복이 안오는 이유"를 당신은 아십니까? 나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내장 속에서 태어나 내장 속에서 죽는 촌충류"처럼 보일 때 당신은 너무 슬퍼서 눈물도 안 나옵니까? 나는 아직 펑펑 소리 내어 울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혓바닥이 있어야 할 자리에 면도날을 붙여놓고 살아온 날들이 너무 많아 면구스럽습니다만, 헤엄의 '헤'자도 모르면서 개구리헤엄을 치겠다고 무작정 심연에 뛰어들었습니다만, 정확히 "내가 새사람이 된 지 5분이 지났"습니다.


유지소 시인은>>
경북 상주 출신. 2002년 시 전문 계간지 '시작'으로 등단했다. 시집 '제4번 방(천년의시작·2006)'을 발표했다. '신선한 형식과 깊이 있는 사유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현재 김해에서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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