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정상을 깎아내 쌓아올린 석축들로 가득한 낙원공원묘지가 국계대저수지 수면 위로 비치고 있다.
지난번 얘기대로 주촌의 이름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1469년의 <경상도속찬지리지>이지만, 행정단위로서의 주촌면은 1765년의 <여지도서>에 처음 등장한다. 1789년의 <호구총수>는 주촌면의 마을로 선지, 원지(元枝), 안지(晏旨), 천곡, 삼백천(三百川), 가곡(歌曲), 농소, 망덕, 내삼, 양동의 10개 리(里)를 기록했고, 1914년에 주서면(酒西面)을 통합하면서 선지(仙池), 원지(元支), 덕암(德岩), 천곡(泉谷), 농소(農所), 망덕(望德), 내삼(內三), 양동(良洞)의 8개 법정리가 생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내에서 주촌(선지)고개를 넘어 선지리의 동선마을을 지나고 서선마을의 선지삼거리에서 서부로1701번 길을 따라 원지리 방향으로 접어들면, 조선시대까지 조만강을 거슬러 오른 배가 정박하던 선지 못의 흔적이 '못뚝소류지'로 남아있다. 못의 둘레에 대해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약 1천300m, 1928년의 <김해읍지>가 약 700m로 전하고 있는 주촌지 또는 주촌제로 생각되는 곳이다. 주촌지(池)의 '못'과 주촌제(堤)의 '뚝'이 '못뚝소류지'란 이름으로 남은 모양이다. 지금은 <김해읍지>에서 전한 정도의 넓이가 남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조선전기까지도 조만강으로 연결되는 2배 더 큰 연못이었던 것 같다. 상류의 옥천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선녀가 목욕도 했다 하고, 그래서 선지라 했다는 전설도 있다.
 
▲ 김해 내외동 방면에서 주촌으로 넘어가는 선지고개.
못 안쪽에 작은 대숲을 등지고 아늑하게 자리한 '못안마을' 내선이 있고, 그 끝에 1964년 개교의 주동초등학교가 있다. 6학급 42명(남21) 학생이 김동섭 교장 이하 15명의 교직원과 함께 공부하는 초미니 학교다. 한 학년에 한 개 반(5~13명)이 있을 뿐이다. 폭발적 인구증가를 자랑하는 김해시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러나 10명도 안 되는 학생들이 선생님 한 분을 독차지하고, 학예회·체험학습·초청강연회 같은 웬만한 행사에 전 학년이 함께 하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부럽고, 향수를 자극하는 교사와 회양목·동백·탱자나무의 낮은 담장이 정겹기 그지없다. 동쪽 담장 너머 새로 지은 내선마을회관(경로당)에 태극기와 새마을기가 나부끼고 있다. 학교의 아이들 떠드는 소리는 경로당 어르신들께 좋은 보약이 될 터이다.
 
▲ 옥천을 따라 가면 덕암리가 나온다.(위)/ 덕암리와 원지리가 갈라지는 길목의 덕원이용원.
동쪽에서 나오는 원지천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옥천이 학교 뒷쪽에서 만나 조만강을 이룬다. 원지천을 따라가면 원지리, 옥천을 따라 오르면 덕암리가 된다. 양쪽마을을 다 돌다 보면 선지삼거리에 처음 들어설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 안쪽 품이 참 넓은 동네란 생각이다. 합수지점에는 2개의 원지교(1996.12, 2000.2)와 내선교(1992.6)가 걸쳐 있는데, 가운데 원지교 앞에는 유별나게 생긴 이발소가 하나 있다. 너른 들을 배경으로 덕암리와 원지리가 갈라지는 길목에 이정표처럼 혼자 있는 덕원이용원이다. 양쪽 마을의 한 자씩을 가져다 붙인 이발소의 하늘색 함석지붕이 많이 바랬고 벽의 백색 칠은 많이 더럽혀졌다. 창도 없이 반 지하처럼 가라앉았는데, 삼각형 지붕의 꼭지점에 교회의 십자가 같은 빨강 파랑의 띠가 돌고 있다. 알루미늄 문을 노크하고 들어섰더니 마침 머리를 깎고 있던 주인장 강동석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서는 나를 내려다 본다. 그도 그럴 것이 장사하는 집에 노크라니! 50년 경력의 이발사로 여기에 자리를 편지는 10여년 정도 되었단다. 생업의 현장을 호기심처럼 들여다 본 죄(?)로 얼굴만 붉힌 채 허겁지겁 되돌아 나왔다. 다음 번엔 머리라도 깎으면서 이 묘한 분위기의 내력과 사연을 들었으면 좋겠다.
 
원지천을 따라 오르는데 동네 어귀에 걸린 플래카드들의 문구가 심상치 않다. '원지리가 누구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는가' 또는 '돼지 재입식 절대 반대' 등이 주민들의 이름으로 붙어있다. 지난 해 초 전국을 휩쓸었던 구제역의 후유증이다. 김해에서 가장 먼저 구제역이 발생했고 2만2천800마리나 되는 가장 많은 돼지들이 매몰 처분되었던 곳이다. 매몰내역과 경고판이 세워져 있는 13개소의 매몰지는 지난 1년 동안 침출수의 문제 등으로 또 다른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구제역과 매몰소동으로 고통 받고, 지하수 오염에 대한 걱정으로 새로 상수도를 놓아야 했던 주민들이 축산업의 재개를 반대하는 심정은 충분히 헤아려져야겠다.
 
▲ 밤송이 같이 동그랗게 생긴 원지리고분군.
문 닫힌 축사들의 행렬이 끝나갈 즈음 길 오른 쪽에 대리마을회관이 보인다. 이제야 겨우 전원마을 같은 풍경이 되었다. 간이포장길을 오르니 누군가가 숨겨 놓았을 것 같은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수면에 커다란 산 그림자가 떨어져 있는 저수지는 <김해지리지>가 '고래새'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뚝 아래에 펼쳐진 과수원과 전답이 제법 아늑해 부자가 많이 살았다는 '큰 마을' 대리(大里)의 이름을 되새긴다. 저수지에서 얼마를 내려와 아래대리 쪽으로 꺾어들면서 원지리고분군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길 오른쪽에 밤송이같이 생긴 동그란 송림이 고분군의 시작이다. 발굴된 적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이래 계속돼 왔던 도굴의 흔적 등을 통해 6세기 후반에서 7세기경에 축조된 100여 기 이상 횡구식과 횡혈식 석실분의 분포가 알려져 있다. 노출된 석실도 있다지만 급한 걸음에 도굴구덩이와 석실분의 봉토만을 확인하고 돌아선다. 지난번 장유 유하마을에서 찾아보았던 고분과 비슷한 모양으로 생각하면 된다.
 
▲ 국계마을에 있는 밀양박씨 '이세사효비' 비각.
서부로1701번 안길로 원지천을 건너 석칠마을로 들어선다. 너른 들판을 앞에 두고 산자락을 의지해 늘어선 마을이다. '돌 일곱'의 석칠(石七)이란 마을이름은 들에 있던 7기의 고인돌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제방공사에 실려가고 들판의 구획 정리 등으로 다 없어진 모양이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길은 주동초등학교에서 오는 서부로1701번 길과 만난다. 마침 석칠마을 버스정류장이 있어 다리도 쉴 겸 앉아보니 앞쪽 길을 따라 늘어선 송림이 범상치 않다. 솔밭 안에 들어서 보니 고인돌로 보이는 괴석도 있고 혼자 서 있는 문인석도 있다. '금월등(琴月嶝)'이란 언덕에 만들어진 무덤들을 지키는 솔밭이다. 중간쯤에 있는 종6품 비변사낭청창녕조공의 묘가 가장 잘 다듬어져 있는데, 1991년의 신도비를 보니 17세기 활천 출신의 조항(曺抗)이 주인공인 모양이다.
 
솔숲을 나서면 냇가에 들국화가 많았다는 국계(菊溪)마을이다. 마을회관을 지나 개울을 거슬러 몇 걸음 위에 밀양박씨의 이세(二世)사효비(四孝碑)가 있다. 부부와 두 아들 네 사람의 2대에 걸친 효도를 기리는 비석이 비각 안에 앉아 있다. 혼자 즐거운 강태공이 세월을 낚고 있는 석칠저수지를 지나 훨씬 높고 크게 보이는 국계대저수지에 오른다. 위쪽 못에서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와 너른 저수지, 둑에서 내려다보는 주촌마을의 풍경이 나쁘진 않지만, 수면 위로 하늘에 떠 보이는 북쪽의 공동묘지는 조금 섬뜩하다. 무덤이라서가 아니라 산 정상을 깎아내 쌓아 올린 잿빛의 석축들 때문이다. 산 넘어 반대편 김해대로의 신천가구마을 쪽에서 올라오는 낙원공원묘지란다.
 
▲ 덕운사 내부 전경.
다시 서부로1701번 길에 내려와 들판 건너로 덕암산업단지와 동서대로를 바라보며 달리다 보면 덕암리노인정과 용곡마을회관이 있는 덕암리로 들어선다. '덕 바위'란 마을이름은 임진왜란 때 흥해 최씨 형제가 피난 와 살며 후진을 가르쳤던 것에서 비롯되었단다. 그 뒷산의 형제바위 또는 덕바위는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 마을회관 바로 위에 나타난 갈림길에 잠시 고민하는데 덕운사의 표지판이 눈에 들었다. 좌우에 청룡봉이 있어 용곡(龍谷)마을이라 했고, 용곡마을 절골에 용곡과 덕암을 합친 용덕암(龍德庵)의 기록이 떠올랐다. 좁은 골목길을 누비는데 갑자기 앞이 트이며 저만치 무암산(舞巖山) 아래에 덕운사가 자리하고 있다. 500년이 넘은 팽나무 두 그루가 고풍스럽고 천왕문과 대웅전이 아늑하다. 마침 점심 공양 중인 동호(東虎) 주지스님에게 유래를 물었다. 자신의 주석은 6년째지만 100여 년은 족히 넘었을 거란다. 부처골이란 폐사지에 비구니 일원(一源) 은사스님이 절을 세운 지도 이미 50년이 넘었다는데, 폐사된 절이란 <김해지리지>의 용덕암을 말하는 모양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황금빛 찬란한 부처의 옆구리와 등이 이상하게 불거져 있어 다시 살펴보니 석불에 붙어 있던 광배(光背)의 일부였다. 광배가 파괴된 석불을 모셔다가 도금불사를 했던 모양이다. 천왕문 앞에 예쁜 소나무와 잘 어울린 요사채는 안성에 있던 이완용의 집을 이축한 것이란다.
 
절 앞 들판을 가로질러 덕암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산 쪽으로 들어가면 덕암의 유래가 된 흥해 최씨의 제실 덕암제가 있다. 시간도 없고 사람도 없어 덕암 찾기는 포기했지만 여기가 '원조 덕암마을'이고 마을 옆 개울은 조만강의 발원지 옥천의 시작이다. 옥천소류지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점골 못 옆을 지나 북쪽으로 쳐 오르면 산꼭대기에 '김해추모의 공원'이 있다. 2003년 10월에 개원한 화장장과 납골당이 있고 수많은 묘지가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흐린 날씨인데도 산꼭대기라 그런지 바람이 차고 거세다. 묘지들 위로 동쪽의 낙원공원묘지, 남동쪽의 주촌마을과 남해, 서쪽 아래로 정산컨트리클럽이 내려다 보인다. 저 아래서 골프 치는 이들에게 언젠가 여기에 누워야 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을 것 같다. 지금 금음산(金陰山)으로 불리는 이 산은 원래 쇠를 캐내던 일로 쇠금산으로도 불렸다. 쇠 금(金)에 무덤을 뜻하는 음택(陰宅)의 음이 합쳐진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아래쪽에 있는 양동고분군이나 망덕고분군 등에서 출토되고 있는 각종의 가야철기가 여기서 생산된 철광석을 원자재로 했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 김해추모의공원에서 바라본 낙원공원묘원.
서부로1637번 길을 따라 덕암산업단지 한 가운데를 지난다. 2001년 5월에 조성한 단지에는 25개 사에서 450여 명이 일하고 있다는데, 길가에 나와 쉬는 외국인 근로자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동서대로에서 내려오는 덕암교차로를 지나 많은 공장들로 이름이 무색해진 옥수골의 옥천교(1998.2)를 건너는데, 길을 잃었는지 흰 두루미 한 마리가 냇물에 서 있다. 급히 들이댄 카메라에 놀랐는지 이내 날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고 있었을 두루미에겐 미안했지만 어지러운 공장들 속에서 나는 위안을 얻었다.
 
동서대로 밑을 지나 새 다리 공사가 한창인 천곡교 앞에서 서부로를 건너 천곡리로 들어선다. 주촌 농협·우체국·파출소를 지나 주촌면사무소에 이른다. 처음에 망덕리에 있던 것을 1929년 이전의 어느 때에 이리로 옮겼고, 1988년 1월 준공의 면사무소를 2008년에 새롭게 단장했다. 김동기 면장 이하 11명의 직원들이 8개리 23개 마을 1천829세대 3천986명의 주민들과 1천504개의 공장과 사업체를 돌보고 있다. 지난달에 비해 주민 38명이 다시 줄었단다. 1만5천여 명이나 되는 근로자들 대개가 출퇴근자로, 거주자의 5배를 넘는다. 쌀농사를 비롯해 화훼·단감·부추를 하던 농촌마을이 주민 없는 공장지대로 변해 마을가꾸기는 엄두도 못내게 되었다. 망덕·농소리의 산단조성, 선지·천곡리의 도시개발과 국도14호선과 58호선의 확장 등은 주촌의 공장마을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옥천(옥수)과 천곡(샘골)의 물이 맑아 술맛이 좋고 인심도 좋았던 마을은 이미 아닌 모양이다.
 
▲ 5월이면 흰 쌀밥 같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이팝나무로 유명한 천곡마을.
저녁이 다 됐는데 파출소 앞 짜장면 집에서 점심의 허기를 때우고 천곡마을회관 옆에 자리한 천연기념물 제307호 천곡리이팝나무(본지 2011년 4얼 20일자 참조)를 찾는다. 5월이면 나무 가득 하얗게 피는 꽃이 흰 쌀밥 같아 그렇게 불렀다 하고, 입하에 꽃 피는 입하목(立夏木)의 '입하'가 '이팝'으로 되었다고도 한다. 500년의 풍상을 겪느라 지친 몸엔 철봉이 받쳐지고 콘크리트가 메워졌다. 하필이면 오늘 환경정비를 위한 포클레인질이 분주한데 무슨 이해가 어긋났는지 옆집 주인과 공사업자가 언쟁 중이다. 나는 못 본 체하고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서지만, 이팝나무는 내내 이런 장면을 지켜보았을 거다. 그렇기에 지금도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될 거라 믿는 주민들의 '마을어른'이 되었고 해마다 제사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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