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동철 전 김해고등학교 교장

신산서원(산해정)을 가려면 이제까지는 대동면 대동로 269번 안길 115 원동마을 안쪽 산기슭을 통해야 했다. 이곳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다. 때문에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진입로의 확보는 인근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런데 민홍철 국회의원과 허성곤 김해시장이 수년 간 노력해 사업비 20억 원을 확보, 2018년 1월 2차선 도로공사에 착공했고 지난 4월 완공됐다.
 
이즈음에 신산서원과 산해정의 연혁을 살펴보고, 이 글이 남명 정신을 다시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산해정은 남명 선생이 30세 되던 해에 김해에 와서 18년동안 학덕을 쌓고 제자를 가르쳤던 곳이다. 신산서원은 선생의 사후 1588년(선조 21)에 부사 양사준과 안희 및 향인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산해정 동쪽 신어산 자락에 건립해 1609년(광해 1)에 사액(賜額)받았다. 1616년(광해 8)에 송계 신계성을 배향(配享)하게 됐고 그 후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毁撤)되었다가 산해정은 1592년 임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燒失)됐다. 이후 1890년에 중건하고 1999년 국비·도비·시비 4억 8000여만 원을 투입해 신산서원을 복원하면서 남명 선생과 송계 선생을 병향(幷享)하게 돼 오늘에 이르게 된다.
 
남명(南溟) 조식(曺植) 선생은 1501년에 외가인 합천 삼가 토동(兎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까지 오른 언형(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 이씨 충순위 국(菊)의 딸이다. 남명은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의젓한 기상을 가졌다. 아버지의 벼슬길을 따라 단천(15세), 한양(18세)에 살며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성운, 이준경 등과 교유하였다. 1522년 22세 때 남평 조씨 충순위 수(수)의 딸과 결혼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시묘살이 3년을 마친 뒤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 김해(炭洞)에 왔다. 아들 차석이 죽고 48세에 고향 합천 삼가의 토동으로 가서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12년간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61세 때 산청 덕산으로 가 덕천서원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다 73세에 별세했다.
 
남명의 대표적인 사상은 경·의(敬義)사상이다. 항상 마음 속에 경건·조신을 품고 있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또 의(義)를 올곧게 실천하기 위해 패도(칼)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귀를 새겨 다니면서 이를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섰다. 대표적으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12명의 제자가 있다. 의병장으로 나선 이들과 함께 후학들 50여 명이 의병운동을 일으켜 국난극복의 구심점이 됐다.
 
또 남명은 임금이 벼슬을 7차례나 하사(下賜)했으나 모두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處士)로 살았다. 1555년(당시 55세)에는 명종이 단성 현감으로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유명한 을묘사직서(일명 단성소)를 올리면서 '전하의 어머니이신 문정왕후는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는 선왕의 고아이실 뿐입니다'라고 했고, 정사를 바로 펼 것을 강조하면서 대유학자의 올곧은 면모를 역사에 남겼다.
 
그리고 남명은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진정한 학문이 아니다'는 교육관으로 다양한 교육방법으로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절의지사 최영경, 학자 오건·김우웅·정구, 영의정 정인홍, 정지린·정복현·이제신·권문임·노흠·문익성 등이 우리 역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러한 남명의 선비정신이 김해에 뿌리내리도록 온 시민이 뜻을 모아 제2회 남명문화제와 남명 선비문화육성사업에 적극 동참하고 성원해 줄 것을 바란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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