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추위가 온 누리를 배회하던 날, 김해 대동 쪽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남명(南冥) 조식 선생을 떠올렸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과 남명 선생에게 마음이 갔습니다.

고운은 당나라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써서 황소의 혼백을 흔들어 놓았다고 하는데, 그의 문장과 기상이 참 궁금했습니다. 그런 선생이 '외로운 구름'이란 호를 지니고 세상을 주유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을 접하고는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짠했습니다.

남명 선생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던 실천적 지식인으로 이름이 높은 분입니다. 선생이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단성소(丹城疎 : 을미사직소)'는 한동안 저의 혼백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전제 왕조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선생은 국왕 명종과 수렴청정을 하던 대비 문정왕후를 직선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단성소의 한 대목입니다.

"(…)이미 나라의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서 히히덕거리며 술 마시고 즐기는 일에 정신이 없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오직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는데 정신이 팔려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가지 백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제가 추운 날 대동 쪽으로 간 까닭은 대동면 주동리에 선생이 공부하고 가르쳤던 서원 산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선생의 묘가 있는 경남 산청에서 선생을 더 우러러고 있습니다만, 김해의 뜻있는 분들은 선생을 '김해 사람 혹은 김해가 낳은 큰 스승'으로 받아들이면서 내심 숭상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서른 이후부터 18년 동안 김해 탄동 즉, 지금의 대동면 주동리에서 살았습니다. 처가가 이 곳에 있었는데, 서른 이후부터 마흔 여덟까지 김해에서 지냈다고 하니 인생의 절정기를 김해에서 다 보낸 셈입니다. 김해는 특히 선생이 정식으로 학문의 기반을 닦기 사작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의 실천적 개혁 사상은 김해에서 잉태되었다는 말들도 합니다.

선생은 이 곳에서 자신의 호를 '남명(南冥)'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남명'은 중국 고전 '장자(莊子)'에 그 모습이 보입니다. "대붕이 바다 위를 날아 장차 남쪽 바다로 옮겨가고자 하니 '남쪽 바다(南溟)'는 하늘 못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선생은 장자의 초탈함과 호방함을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산해정 정문 앞에 서 보니 왼쪽에 자그마한 시비가 서 있습니다. '산해정에 대를 심으며'라는 한시가 적혀 있습니다.

이렇습니다. "대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 소나무가 이웃이 되어 있는데/ 바람 불고 서리 치는 때 아니더라도/ 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 볼 수 있네."

저는 풍수지리에 문외한입니다만, 신어산 기슭이기도 한 대동면 주동리 산해정에 가 보면 선생의 정신의 뼈와 살이 여문 곳이 이곳이란 사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멀리 유장한 낙동강이 보이는데, 왠지 편안하면서도 절도가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김해의 부모님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산해정에 가서 부디 선생의 좋은 기운을 많이 많이 받아오시면 좋겠습니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