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장을 헐어낸 김해여중. 개방된 학교 건물과 운동장이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이곳에서 내일을 꿈꾸는 꽃다운 여중생들의 재잘거리는 이야기 소리가 저 멀리 교실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하다.

담장 허문 김해여중 재잘대는 목소리 정겹고
홍살문 높이 솟은 향교선비 글읽는 소리 들려오는 듯


김해건설공고의 매화로(梅花路)를 나서서 구지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김해여중 앞을 지난다. 몇 년 전에 헐어 낸 담장 덕분에 시원하게 펼쳐진 운동장과 교사가 개방적이다. 거리의 소음이 조금 더 커지고, 교실서 공부하는 학생들 시선이 다소 산만해졌을 수도 있겠으나, 열린 공간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그만큼 밝아지고, 지나는 어른 세대는 다시 한 번 김해의 교육을 생각하는 기회가 된다. '공(公)이란 드러내는 것'이란 명제를 생각할 때, 학교나 공공기관의 담장 허물기는 참 환영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들여다 보기' 가 아니라, '함께 지켜주기' 위한 공간의 창출이라면 좋겠다.

김해여중의 운동장과 체육관은 한국 여자하키의 산실이기도 하다. 좀 전에 폐막된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땄던 우리 여자국가대표팀에는 김다래와 천슬기 같은 김해여중 출신 선수가 적지 않다. 비인기종목의 서러움에 항상 어려우면서도, 기회마다 국민 사기를 북돋아 주고 국위를 선양하는 역할에서 우리 하키는 언제나 효자종목이다. 더구나 김해는 한국 하키의 메카이다. 김해여중, 김해여고, 김해서중, 김해고 출신 또는 인제대, 김해시청 소속의 남녀국가대표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메달을 목에 건 선수 또한 적지 않다. 기념관도 만들고 대회 홍보나 서포터즈의 결성과 지원도 열심히 해서 김해에서만이라도 비인기종목의 서러움을 겪지 않도록 하고픈 바람이 절실하다.

▲ '교복의 거리'라 불리는 대성동사거리
약간 비탈진 경사길을 올라 대성동사거리로 향한다. 동서의 구지로와 남북의 가락로가 만나는 오래된 네거리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게 교복가게와 미술학원이다. '교복의 거리'라 불려도 좋을 만큼 청소년 연예인들을 모델로 내세운 교복 선전의 대형 포스터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금까지 지나온 아래쪽 학교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해 가면 여기는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을 뒤로 하고, 동쪽 분산을 향해 오르던 길을 잠시 왼쪽으로 꺾어 든다. '전통의 김해여고'에 들러야 하기 때문이다. 허왕후릉 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길 건너 오른쪽으로 김해여고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아스팔트길이긴 해도 양쪽으로 낮고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품이 일종의 향수마저 느끼게 하는 길이다.

올해로 개교 55주년이 되는 김해여고는 이미 2만 명에 가까운 졸업생을 배출한 우리 지역의 명문교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 합격자도 여럿 내었고, 올해에도 동문의 외무고시와 사법고시의 합격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정문 옆에 한동안 걸려 있었다. 교기로 정하고 있는 하키부는 전국대회에서 언제나 우승을 다투는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 10월에 열렸던 제90회 전국체전에서는 11명이 뛰는 경기에서 11명의 선수만으로 여고부 우승을 차지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요즈음은 김해시도 커졌고, 여러 고등학교도 생겼지만, 김해여고의 교복이 김해 남학생들의 동경이었던 시절도 있었단다. 정문을 들어서면 식당과 체육관의 금벌관 옆으로 교사들이 늘어섰고 그 앞에 여고다운 오붓한 운동장이 있다. 운동장 한 쪽에는 대개의 여학교가 그렇듯이 신사임당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역의 특색을 살려 허왕후상이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김선동 교장 이하 90여 분의 교직원이 가르치고 37학급 1천430여명의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김해여고 정문을 내려와 왼쪽으로 꺾어 들면 2004년에 다시 세워졌다는 어느 효자와 열녀를 기리는 비각이 있고, 거기에서 왼쪽으로 돌아보면 기와를 얹은 돌담 끝에 김해향교의 홍살문이 높이 솟아 있다. 홍살문 옆 안내판 등에 따르면 조선 태종 8년(1408)에 지금 중앙여중 자리에 처음 세워졌다가 화재와 태풍, 그리고 분산의 붕괴 등으로 인해 몇 번의 이전을 거쳐 영조 46년(1770)에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한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유교적 교화로 지역정서를 순화시키겠다는 풍화루(風化樓)가 드높고, 풍화루를 지나면 공부하는 명륜당과 유교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앞쪽은 교육공간, 뒤쪽은 제사공간으로 구성된 가장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명륜당 왼쪽 아래서 경계하는 건지, 반갑다는 건지, 묘한 톤으로 짖어대는 백구 한 마리의 눈치를 살피며 대성전(大成殿)으로 걸음을 옮긴다. 대성전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 유교 성현 25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음력 2월과 8월에 큰 제례를 받들어 행하고 있다. 1941년에 일제가 대성쵸(大成町)로 불렀고, 1947년부터 우리가 대성동으로 불러 오고 있는 이 동네 이름은 모두 이 대성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거의가 그렇듯이 대성동 전에는 향교(鄕校)가 자리해 교동(校洞)으로 불려왔고, 길 건너편 가까이에 김해읍성의 북문이 있었기에 북문마을로도 통해 왔다. 조선시대까지 나라에서 토지, 전적, 노비 등을 받아 학생을 가르치던 명륜당은 2007년 3월 22일에 다시 화마(火魔)에 휩싸였다. 전기누전으로 추정된 불은 20여 분만에 꺼졌지만, 전체를 새로 지어야 할 정도로 타버려 5억 원 가까운 거금을 들여 2008년 9월에 복원되었다. 김해정신의 중요축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고, 1983년부터 경남유형문화재 217호로 지정돼 온 유적이기도 하니, 더 이상의 재난도 없어야겠고, 우리 지역에 산재하는 다른 문화재 관리를 위한 교훈으로도 삼아야 할 것이다.

▲ 김해향교 풍화루. 유교적 교화로 지역정서를 순화시키고자 했던 것처럼 그 위용과 자태가 드높다.

향교를 나서면 '김해향교(金海鄕校)'라 쓴 표지석 옆에 유림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5칸의 전통양식을 딴 3층짜리 현대식 건물이다. 향교에서 진행할 수 없는 행사나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2001년 2월에 낙성하였다. 가야문화축제 때는 한시백일장이 열리고, 성년의 날 행사, 지역의 노인 어르신을 모시는 기로연(耆老宴)과 전통혼례 등이 거행되고, 서예와 한문 강좌가 진행되기도 한다. 향교와 유림회관이라면 노인들만 모이는 경로당같은 인상이 짙고, 아마도 세대교체 같은 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같다는 인상이 일반적일 것이다. 주말이 되면 필자가 근무하는 인제대 인문사회대 건물에는 한자능력검정시험을 보러오는 어린 학생과 학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 학동들의 동기를 살리고, 흥미도 잃지 않는 한자와 한문 교육, 인성과 예절을 아울러 가르치는 향교와 유림회관이 된다면, 지난해 허선 전교(典校)가 "글 읽는 소리가 나는 향교로 만들겠다"고 했던 말씀도 실천될 수 있을 것이다.

▲ 각종 행사와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김해향교 유림회관
유림회관의 준공연도를 알고 싶어 3층 사무실에 들렀더니 10월에 새로 부임하신 김효구(金孝求) 전교가 집무하고 계셨다. 할아버지 품에서 놀면서 배우는 손자, 경로당에서 청년관처럼 변하는 세대교체야말로 유학 현대화의 실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젊은이들의 기(氣)를 받은 어르신들의 활력고양도 기대될 수 있을 것같은 생각이 든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자가 함께 자란다'고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했던가.

유림회관을 나서 구지로를 좀 더 올라가면 해성사사거리에서 호계로와 맞닥뜨린다. 호계로는 1993년에 호계천을 복개해 만든 도로이다. 조선시대의 김해지도는 물론, 1948년의 지도에도 제법 넓은 하천으로 그려져 있다. 1820년경의 지도를 보면 분산에서 내려 온 호계천이 향교 동쪽을 지나 김해읍성 북문 동쪽에 마련된 수문(水門)으로 읍성 밑을 지나고, 동상동사무소와 연화사 동쪽 담장 옆을 통해, 남쪽으로 곧바로 내려가는 흐름이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이 지도의 호계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포교당이란 이름으로 친근한 연화사에서 호계로(호계천)를 건너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진한 먹 글씨로 파사탑(婆娑榻)이라 쓴 한 채가 그려져 있다. 그 집안에는 석탑과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허왕후가 시집올 때 바다의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이다. 지금 허왕후릉에 있는 파사석탑은 원래 여기 호계천 가의 호계사(虎溪寺)라는 절에 있었던 탑이었다. <삼국유사>에 파사석탑을 기록한 고려 말의 일연스님도 직접 여기 와서 탑을 보았다. 호계천은 호계로로 바뀌고, 파사석탑의 호계사는 자취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동광초등학교쯤이었다고 짐작되지만, 앞으로 재개발이라도 이루어진다면 고고학 자료라는 흔적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동광초등학교 서쪽 담벼락 아래 좁은 비탈에서 연대가 올라갈 것도 같은 기와와 토기 파편 몇 개를 주워 돌아왔다.

또한 이 일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전동이라 불렸고, 1820년경의 지도에도 다전리(茶田里)라 기록되었다. '차(茶)밭(田)마을'이란 뜻으로, 옛날에는 차나무가 많았다고 전한다. 최근에 더욱 유명해지기 시작한 장군차(將軍茶)도 여기에서부터 조금 전에 지나온 향교를 거쳐 롯데캐슬 뒤편 분산 자락에까지 군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전하는 기록들이 많다. 말 나온 김에 다리도 쉴 겸 장군차 한 잔 하러 가야겠다.



 Tip - 김해장군차
고려 충렬왕, 백운대 금강사 마당 차나무에 반해 '장군' 칭호

▲ 서재골 장군차 나무. 자생군락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2010년 10월, 대만에서 열린 세계차연합회 주관 국제명차품평대회에서 김해장군차가 녹차 부문에서 금상, 발효차 부문에서 은상을 각각 차지했고, 국내에서는 3년 연속 올해의 명차에 선정돼 그 주가를 한층 높이고 있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전승도 있지만 불확실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이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독려하기 위해 지금의 백운대 근처 금강사(金剛社(寺))를 찾았을 때 마당 가득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산(山) 차나무에게 장군의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 사적에서는 장군나무(將軍樹)라고만 기록되었으나, <김해읍지>에서 특산물로 황차(黃茶)를 소개하면서, 금강곡(金剛谷)에 있으며 일명 장군차(將軍茶)라 한 것이 근거가 되었다. 김해읍성 동문 밖인 현 동광초등학교에서 롯데캐슬가야 뒤쪽 서재골에 걸치는 사면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나, 토지구획정리사업 등으로 서재골 입구 왼쪽 사면에 수십 그루가 남아 있을 뿐이다. 김해시는 10여 년 전부터 본격재배를 시작해 장군차의 복원과 명품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으며, 대중화를 위해 봉하마을을 비롯한 6개소의 기념품 판매소, 13개의 시범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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