莫神一好
막신일호한가지 좋은 일에 미치는 것만큼 신명나는 일이 없듯
삼척 육송 호젓한 찻집 주인은 오로지 차만을 고집하며 세상
시름에 지친 이들을 차의 향기로 취하게 한다.


신묘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송년회다 망년회다 해서 술자리만 쫓아 다니다 보니 한 해를 돌이켜 보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는커녕 몸과 마음만 망가진 느낌입니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진 않으나 이제라도 심신을 추스리고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먹었습니다. 공간은 때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합니다. 한 해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공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믿을 만한 지인으로부터 신어산 자락에 위치한 찻집 한 곳을 소개 받았습니다. 심신을 맑게하는 차(茶)를 내는, 그것도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 위치한 집이라면 더할나위 없겠다 싶었습니다. 신묘년 첫번째 '맛을 찾아서'는 독자 여러분을 차향 그윽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 금란지교

공자는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둘이 한마음이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르고, 한마음으로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고 했다. 은근하면서도 굳은 우정을 의미하는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유래다. 또한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깊은 산 속 난초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향기롭다'했다. 청초한 향기가 천리를 간다(蘭香千里)하니 어디에 있다 한들 사람이 그 향에 이끌릴 수 밖에 없다. 김해시 상동면 묵방리, 장척계곡 초입에 있는 전통다원 '금란'은 굳이 존재를 드러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향기에 이끌렸든, 풍광에 이끌렸든 이유야 제 각각이겠지만 이름값 하나 만큼은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 삼척 육송, 30개월의 건축기간
 

찻집에 도착하니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원주택풍의 통나무집이다. 살짝 실망스럽다. 헌데 골조를 이루고 있는 나무가 제법 묵직하고 단단해 보인다. 여느 통나무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강원도 삼척에서 자란 육송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좋은 나무를 사용해 공들여 짓다보니 2002년 중반에 시작한 공사가 2005년 2월에서야 완공 됐다. 어지간한 규모의 아파트 단지 공사와 맞먹는 기간이 걸렸다. 실내로 들어서니 바닥은 따뜻하고 공기는 포근하다. 장작을 때는 벽난로가 운치를 더한다. 넓은 창을 통해 내려 앉는 햇살이 살가운 느낌이다. 신년 계획이고 뭐고를 떠나, 온기를 간직한 나무에 기대 잠시 낮잠이라도 즐기면 좋을 듯 싶다.  
 

■ 200종이 넘는 차

차를 주문하기 위해 메뉴판을 부탁했더니 한지로 손수 만든 메뉴판을 건넨다. 어지간한 책 한 권 분량이다. 우리차, 청차, 홍차, 보이차, 중국녹차, 건강차, 화차, 허브차 등 10여 개의 카테고리에 200종이 족히 넘는 차를 구비하고 있다. 보이차만 해도 27종이나 있다. 이 많은 차가 정말로 다 준비되어 있을까? 실내 한켠을 빼곡이 채우고 있는 차를 보면 믿을 수 밖에 없다. 각종 화차, 허브차, 건강차 등은 지리산에 있는 직영 농장에서 직접 재배하고 있다. 어지간한 애정과 내공이 아님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다. 전통다원으로서의 금난의 고집은 차의 숫자 뿐만 아니라 메뉴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시내 외곽에 있는 이런 찻집에서는 차와 함께 칼국수, 수제비 등 간단한 식사도 함께 판매한다. 하지만 금난에서는 오로지 차 밖에 만날 수 없다. 그만큼 차 하나에만 집중하겠다는 주인장의 고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 전통다원 '금난'의 내부 모습.
■ 여섯 가지 다식

우선 주인장께 황차부터 주문했다. 차를 기다고 있자니 건포도, 볶은콩, 양갱, 해바라기씨, 꿀대추, 쑥떡 등의 다식을 내어 온다. 취재라고 너무 신경쓰지 마시라 말씀드렸더니, 착각하지 말란다. 차를 주문하는 모든 손님께 여섯 가지 다식을 제공한다고 한다. 찻값이 살짝 비싼게 아닌가 싶었는데 차의 질과 다식의 종류를 보고 나니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차와 다식을 즐기며 상념에 잠기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금난은 속된 말로 '게기기' 좋은 곳이다. 복잡한 일상을 잠시 내려 놓고 차분히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가만보니 모든 손님이 그저 차 한잔 하고 일어서는게 아니라 오래 머문다. 다들 차에 취했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수습하기 힘들지만 차에 취하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다. 그래서 사람들의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
 

■ 막신일호

▲ 금난 대표 변영민 씨. 지리산 등반길에 마신 '고뿔차'에 반해 다인의 삶을 살게 된 그가 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쯤되니 이 공간을 직접 만들고 운영하는 주인장이 궁금해졌다.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금난을 지키고 있는 변영민(62세) 대표께 인터뷰를 청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변 대표의 철학은 확고 했고 말은 청산유수였다. 기자가 질문할 틈도 없이 자신의 지나 온 삶과 차에 대한 애정을 쏟아 냈다. 1960년대 말 늦가을 지리산 등반길, 하룻밤 쉬었던 민박집에서 차 한잔을 얻어 마셨다. 그때 마신 차가 '고뿔차'라는 발효차 였다. 지리산 자락의 전통차인 고뿔차는 감기를 낮게하고 소화제나 두통약 대용으로 사용되는 일종의 민간요법이었다. 고뿔차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다인(茶人)으로서 그의 삶은 시작되었다.
 
막신일호(莫神一好), 한가지가 좋아서 미치는 것 만큼 신명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찻집 한켠에서 걸려있는 이 말은 변 대표의 지난 삶을 압축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쳐 이 정도 성취를 이뤄낼 수만 있다면 그 삶은 충분히 의미 있으리라 생각됐다. 하지만 한 집안의 가장이 뭔가에 미쳐 있으면 가족들에겐 소원해 지기 마련이다. 프로선수에게 동계훈련이 중요하듯 우리네 인생에서도 때론 동계훈련이 필요하다. 너무 멀리 가서 되돌리기엔 늦어 버리기 전에 때때로 뒤를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변 대표는 현재를 인생의 동계훈련 기간이자 가족을 위한 삶으로 규정했다. 나아가기 보다는 멈춰서서 모든 것을 가족에게 돌려주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즘 무슨 재미로 살아 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하루 세끼 먹는 재미로 살아 간다"라고 답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삶,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는 규칙적일 일상. 사람의 행복이란 결국 아주 근원적인 것에서 부터 비롯됨을 그는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 18년을 장수한 개

차의 효능을 설명하면서 그는 아주 흥미로운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어느날 길거리에서 파는 황구 한 마리를 만원에 샀다. 주인이 차를 좋아하니 개도 주인의 취향을 따랐다. 평생을 황차를 먹고 자란 개는 무려 18년을 살다 갔다. 개의 평균 수명이 10년 임을 감안하면 곱절 가까이 장수를 한 셈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느냐며 강조하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앞으로 차를 물 대신 꾸준히 마셔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 숨어있기 좋은 방

차향에 이끌려 찾았다가 공간의 편암함에 빠져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 금난은 '숨어있기 좋은 방'이다. 한번쯤 자신을 돌아 보고 싶을 때, 친구나 연인과 속 깊은 대화를 나고 싶을 때 안성맞춤이다. 그보다 더 좋은 경우는 가족과 함께다. 온 가족이 책 몇 권을 준비해서 금난을 찾으면 좋을 듯 싶다. 차 한잔씩을 앞에 놓고 독서 삼매에 빠져있는 가족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일 것이다. 차에 대해 굳이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상관 없다. 금난을 지키고 있는 변영민 대표께 여쭤보면 아주 친절하고 세밀하게 안내해 드릴 것이다.
위치 : 김해시 상동면 묵방리 장척계곡 입구
연락처 : 055-323-7230



차의 효능
머리를 맑게 귀를 밝게 이보다 좋을 수가

전남 강진에 가면 다산 정약용선생께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선생은 이 곳에서 10년의 유배생활을 보내는 동안,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제유표 등 500여권의 저서를 집필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하셨다고 한다. 유배라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그가 이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선비로서의 자세와 본분을 잃지 않은 의연함과 그 과정에서 결코 '풍류'를 잃지 않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초당에는 '다산4경'이라고 정약용선생의 손길이 직접 닿은 4가지 유적이 있다. 헌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중 세가지가 차(茶)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찻물을 얻기위해 파 놓은 약천(藥泉)과 찻물을 끓이던 부뚜막인 다조, 그리고 차를 즐기며 바라보던 연못인 연지(蓮池)가 그것이다. 다도가 맞느니 다례가 맞느니 하는 전문적인 영역의 문제는 잘 모르겠지만 다산초당을 가보면 생활의 여유를 찾기위한 방편으로 차를 즐겼던 우리 선조들의 방식이 훨씬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든다.
 
절차와 격식을 따지기 보다는 생활 속에서 차를 즐기는 일상적인 차문화의 정착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몸에 좋다 그러면 굳이 권하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구하는 경향이 있다. 차문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차가 가진 효능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차의 효능은 일찌기 초의선사께서 설파하신 차유구덕(茶有九德)에 잘 정리되어 있다.
 
뇌를 맑게 한다(이뇌 利腦), 귀를 밝게 한다(명이 明耳), 눈을 밝게 한다(명안 明眼), 입맛을 좋게 한다(구미조장 口味助長), 피로를 풀게 한다(해로 解勞), 술을 깨게 한다 (성주 醒酒), 잠을 적게 한다(소면 少眠), 갈증을 멎게 한다(지갈 止渴), 추위를 이기고 더위를 물리게 한다(방한척서 防寒陟暑).
 
세상에 이 보다 좋은 음식이 또 있을까?






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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