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그리는 화가' 강요배 예술 산문집
 비극의 역사 담긴 제주 파도·바람 묘사



<풍경의 깊이>는 화가 강요배(68)의 45년간 생각들을 담은 예술 산문집이다. 강요배는 4·3 항쟁의 화가이자 제주도를 그리는 화가다. 한 화가의 인생에 펼쳐진 생각의 여로가 투명한 구슬처럼 환히 들여다보이는 글들이다. 책에는 130여 점의 대표작도 실려 있다.
 
그는 17세 때 비로소 전깃불이 들어왔던 제주 한 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다. 가난한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에게 "제가 이 다음에 돈 많이 벌어 드릴게요"라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 대답은 달랐다. "머리가 시원한 사람이 돼야지!" 어머니가 말한 '머리가 시원한 사람'은 그의 오랜 화두가 되었다. 단순하고 단박함으로 나아가는 그의 삶이 되었다.
 
그는 섬을 떠나 대학을 다니고 미술운동을 하면서 도회지에서 20년을 살았다. 그리고 다시 제주도로 갔다. 제주 4·3 항쟁의 역사와 제주의 자연을 만났다. 그의 그림 세계 바탕에는 그가 어릴 적 체험한 제주가 원체험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검은 돌담, 어둑신한 구름, 귀를 때리는 바람, 뼈가지로 버티는 팽나무, 바람까마귀 떼, 영겁의 파도소리, 검은 갯바위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그림 세계의 모든 것이다.
 
그러면 그가 그토록 그려내고자 했던 4·3의 비극적 역사는 어디로 갔는가. 뼈가지로 버티는 팽나무, 귀를 때리는 바람, 영겁의 파도소리 속에 그 비극적 역사가 오롯이 들어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길항하는 듯한 제주의 자연과 역사는 그의 그림을 통해 온전히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폭풍 칠 때, 찬바람 불 때, 어스름할 때, 이게 진짜 제주도다.' 자연의 절규는 사람의 절규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의 양이 작품의 질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들여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을 산다(生)'는 것이다. 1995년 그림 '흙노래'는 흙처럼 살다가 흙속으로 사라진 민초들을 그린 것이다. 백성들의 얼굴이 제주 흙밭 속에 맺혀 있다. 강요배는 이 작품을 그릴 때 한 서리고 애달픈 제주 민요와 노동요 100여 편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들었다고 한다. 구성진 민요 가락이 작품에 빙빙 맴도는 그런 그림인 것이다.
 
그림은 기운을 포착하는 거라고 한다. 제주의 바람과 파도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림의 획과 붓의 속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쉭쉭 소리 나게 선을 그어야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출렁거리고 부서지는 것이다. 그는 핵심을 뽑아 올리는 '추상(抽象)'보다는 무엇을 버린다는 '사상(捨象)'에 더 기울어 있다고 한다.
 
그림은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는 강렬한 하나를 뽑아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주의 역사요, 자연이다. 단순해야 심오해질 수 있다는 게 느껴진다.
  
부산일보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