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국어·한국학 학자들 좌담 수록
방언 사용권 존중되는 사회 만들어야
한국어, 더욱 풍성하고 생동감 넘쳐



다시 한글날이다. 강제 개항과 식민지, 해방과 압축 산업화의 '찢긴 근대' 속에서 한국어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은 우리 말글살이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며 한국어의 생동하는 앞날을 내다보려 한 책이다.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 좌담회를 보완해 책으로 묶은 것이다. 좌담회 참여자는 문학평론가 백낙청, 한국학·한문학 연구자 임형택, 각각 방언학과 국어사전학을 전공한 정승철 서울대 교수와 최경봉 원광대 교수, 4명이다.
 
눈에 띄는 주장들. 첫째 방언 사용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근대는 국어에 대해 억압적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표준어 정책이 그것이다. 근대 민족국가에서 국민어를 수립해야 된다며 사투리 추방운동까지 벌였다. '사투리를 쓰면 창피하다'는 의식이 그때 뿌리내렸다.
 
1972년 유신 체제가 들어선 전후에 어문 민족주의 입장에서 국어순화운동도 극심했다. 1960년대 중반 소설가 이문구는 충청도 방언을 구사한다고 '헌마을 작가'로 불렸다고. 1990년대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비로소 사투리 복권이 시작됐다. 정승철은 "공용어는 반드시 쓰는 '표준어'가 아니라 써도 쓰지 않아도 되는 '권장어'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표준어 억압을 넘어서 지역어·사투리를 보전 진흥해야 한다. 요컨대 한국어에서도 수도권 집중이 아니라 지역균형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공통어 기준은 서울말(중류층)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계층 세대가 두루 쓰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만들어진 서울말 중심의 조선어학회 표준어 규정은 일본어에 대항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개발독재와 근대화 제일주의 시대를 벗어난 지금, 서울말 규정은 낡아도 너무 낡았다. 나아가 한국어를 보는 이런 폭넓은 관점에 따라 장차 통일시대 남북 언어의 이질성도 극복할 수 있다. 어느 한쪽으로 단일화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말에 새겨진 남북의 경험과 감정을 그대로 인정하면 된다는 것이다.
 
역사를 살피건대 조선시대 한글 탄생은 고려시대부터 축적의 전사를 지녔다. 임형택에 따르면 역사상 전례 없이 소용돌이치던 원 제국의 문명을 익힌 고려 말 사대부들이 문명의식과 동인(東人)의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 조선왕조였는데 그 왕조에서 피어난 꽃이 훈민정음이라는 것이다. 독자적인 문화를 가져야 한다는 의식의 실현이 한글이었다는 거다.
 
나아가 임형택은 "개화기와 애국계몽기에 구사된 국문·국한문의 이중문어체계가 단일 체계로 전환한 변곡점이 1919년 3·1 운동"이라고 했다. 근대 한국어의 시작은 1919년이라는 것이다. 1920년대에 근대적 논설체가 성립한다. 1900년대 애국계몽운동이 주도한 '논설의 시대'는 1910년으로 막을 내렸으나 3·1 운동 이후 의식의 각성으로 새로운 '논설의 시대'를 연다. 논설문 성립의 사상적·이론적 기초가 된 것이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었다.
 
특히 문인들은 한국어의 단단한 근육과 부드러운 속살을 만들어갔다. 이광수와 김동인은 문장종결법을 '-더라'에서 '-했다'로 바꿨다. 근대성을 구현하기 시작한 소설과 그 작가들이 새로운 시대의 문장형식과 한국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1930년대 말 발표된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함께 한국어의 지평을 드넓혔다. 이태준은 "언어는 민중 전체가 의식주보다도 평등하게 가지는 최대의 문화물"이라고 <문장강화>에서 갈파했다.
 
한국어는 현재 정보화 다원화 세계화 남북통합의 큰 과제 앞에 서 있다고 한다. 이에 융통성 있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민족국가가 아니라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국어정책이 수립돼야 한다는 것이다. 백낙청의 말이다.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것은 말을 아끼는 마음이다. 말 아끼기야말로 말공부뿐 아니라 마음공부가 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 언어집단의 공동영역은 격조 높고 우아한 표현들과 더불어 언중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막된 말도 있어야 품격과 활력을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다." 한국어는 더욱 풍성하게 생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일보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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