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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반천을 따라 역사 속 '쇠바다 구릉'을 걷듯 노닐 듯(15)봉황대 ~ 대성동고분 ~ 구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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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2.04.03 15:21
  • 호수 68
  • 12면
  •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report@gimhaenews.co.kr)

   
▲ 대성동 고분박물관 앞.
가락국 도읍지였던 김해 원도심. 그 중에서도 금관가야의 국제교역로였던 해반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봉황대, 대성동고분군, 구지봉 등 쇠바다의 구릉지를 어슬렁어슬렁 봄볕 따라 걸어 본다. 마침 이 길이 '가야의 거리'이면서 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가야문화축제'가 열리는 메인 스트리트 주변 구릉이라 더욱 좋은 기회이겠다.

부원동 <김해뉴스>사무실에서 나와 회현동 방향 봉황대 쪽으로 길을 잡는다. 따뜻한 봄볕이 머리 위로 '꼬물꼬물' 거린다. 김해지리지에 의하면 회현동은 옛날의 여우고개라는 뜻의 '호현(狐峴)'이었다가 지금의 '회현(會峴)동'으로 바뀌었다 한다.
 
안인정미소가 나오고 곧이어 '점바치 골목'으로 들어선다. 백두장군, 천상선녀, 약명도사, 글문도사 등 10여 개의 점집이 한 골목에 빼곡히 들어서 있다. 봉황대를 '당산'이라 불렀던 것을 보면 봉황대 주위 점바치집의 밀집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봉황대 입구. 매화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세월의 움직임은 그렇게도 사람의 손으로는 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봉황대는 조선시대 김해부사 정현석이 김해분성 서쪽에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양의 작은 산에 대를 쌓고 '봉황대'라고 부르면서 유래되었다.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유적지로, 가야시대 대표적 조개더미인 '회현리패총'과 합쳐져 지난 2001년 사적 제2호(구 문화재 자료 제87호)로 확대 지정되었다.
 

   
▲ 봉황대 입구 쪽 돌담길. 고즈넉한 풍광이 봄기운과 어우러져 시공간을 뛰어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진=최산·여행전문가 tourstylist@paran.com
봉황대 유적 종합안내도 앞에 선다. 황세바위, 여의각, 패총전시관, 가야주거군 등 가야의 역사와 설화가 촘촘히 새겨져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패총전시관이 길손을 맞는다. 전시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약간 어두운 실내 전체가 그야말로 '조개의 무덤'이다. 10여m 깊이의 패총단면을 발굴된 그대로 보존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굴, 고동, 백합 등 조개류들과 동물 뼈, 김해토기 파편, 불에 탄 쌀 등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봉황대 지역이 바다였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주요한 유적이기도 하다.
 
패총 주위로 대나무 숲과 느티나무가 가지 전체에 잎을 틔우며 푸른 물이 들고 있다. 봉황대와 인접한 집 두어 채, 집집마다 비자나무가 서 있고 담 밑으로 정구지, 파, 미나리 등이 푸르게 햇볕을 받고 있다. 겨울초는 이미 꽃대가 한 뼘씩 올라왔다. 꽃대를 따서 입에 넣고 씹어본다. 쌉싸래하면서도 아삭거리는 맛이 씹을수록 구수하다. 진한 풀냄새에 풋풋한 봄을 맛보는 것 같다.
 
봉황대 유적으로 길을 오른다. 길 입구의 진달래가 꽃잎을 열었다. 수줍은 새색시의 볼처럼 연분홍 색깔이 여리디 여리다. 곧이어 가야주거군. 가야시대의 주거형태를 잘 알 수 있도록 재현해 놓았다. 그 앞으로 분산성이 보인다.
 
'경주이씨 김해화수정'을 뒤로하고 조릿대 숲을 지난다. 대밭의 수런거림이 심상찮다. 시내 중심가임에도 '가야의 자리'라서 그런지 고요하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노송 두어 그루 뿌리를 밟고 오르니 여의각(如意閣). 여의낭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현판의 글씨는 서예가 청남 오제봉 선생이 썼다.
 
손가락으로 뚫어놓은 문풍지 사이로 여의낭자 초상이 어렴풋이 보인다. 사랑하는 이를 다른 여인에게 보내고, 평생을 그리움 속에 살다간 여인의 서글픈 얼굴이 사람 마음을 저리게 한다.
 
여의각에서 길을 오르니 조릿대 군락과 마삭덩굴이 반긴다. 길옆으로 두어 사람 앉을 수 있는 바위가 있는데, 빗돌 설명으로는 '독서대'라고 하여 여의낭자가 공부하던 곳이란다.
 
   
▲ 여의각 앞에 있는 비석.
바위로 난 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임호산이 멀리 삿갓처럼 서 있고, 곧이어 봉황대에 선다. 드넓은 김해평야가 시원스레 펼쳐지고 그 왼쪽으로 분성산과 만장대가, 오른쪽으로는 임호산과 해반천이 눈에 들어온다. 뒤로는 경운산 능선이 소 잔등처럼 누웠다. 이렇듯 작은 구릉이지만 옛 가야국 땅이 훤히 다 조망되는 '가야의 요지'가 봉황대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거세다. 큰 바람이 내내 머물며 '쇠바다'의 중심부를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바위들도 예사롭지 않다. 바위 한 곳에 무명인이 새긴 '가라대(伽羅臺)'라는 글자만 봐도 그렇다. 벚나무 군락도 100년은 족히 되었을 법 하다. 막 꽃망울이 고개를 내미는데 곧 하얗게 난분분댈 것이다.
 
정상에서 내려와 황세바위에 선다.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숲은 흐느끼듯 제 잎들을 비비며 서걱대고 있다. 황세바위에 오른다. 옛 왕궁 터가 앞으로 보인다. 그 곳을 보고 황세가 오줌을 누니 왕궁 앞까지 물바다가 되었다는 설화도 전해져 오는 터다.
 
그래서 김해 토박이라면 어린 시절 봉황대 황세바위에 '오줌 안 눠본' 개구쟁이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설화를 좇음으로써, 바위에는 오줌줄기에 움푹 파진 자국과 오줌발 흐른 흔적이 뚜렷하다. 옛 가야와 현재가 이렇게도 만날 수가 있겠다 싶다. 황세바위에서 보니 분성산 능선과 경운산 능선이 합쳐지며 여뀌 잎 같은 김해시를 오롯이 감싸고 있다.
 
산책로 따라 해반천 쪽으로 내려가는 길. 홍매화와 백매화가 함께 어울려 벙글었다. 바람결에 꽃 이파리가 후드득 떨어진다. 매화향이 향기롭기 그지없다. 산수유 노란 꽃도 절정의 노래를 부른다. 가야의 거리로 내려선다. 봉황대 연못에 가야의 배가 정박해 있고, 연못에는 부들이 새 잎을 내며 따스운 봄볕을 받고 있다. 버드나무도 물이 오를대로 올라 긴 가지 늘어뜨리며 꼬박꼬박 졸고 있다.
 
   
▲ 봉황대 황세바위.
가야의 기마무사상을 뒤로 하고 대성동고분군 쪽으로 향한다. 가야의 거리에는 김해문화축제 개최를 알리는 현수막과 축제등불을 걸어 놓았다. 걷다보니 대성동고분군. 사적 341호 대성동고분군은 김해건설공고와 김해공설운동장 사이의 동서로 뻗은 구릉지대에 있는 가야의 무덤들이다. 길이 약 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으로, 경사가 완만해 무덤이 있기에 아주 적합하다. 1~4세기 가야의 지배층 무덤으로, 김해를 중심으로 성장한 가락국의 실체를 규명하는 획기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고분 발굴지로 오른다. 고분군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 빈 가지로 신산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고 있다. 뿌리 사이로 돌들을 움켜지고 있는 품이, 오랜 인고의 세월을 이겨냈음이리라.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나무줄기에는 돌이끼가 저승꽃처럼 피고, 뿌리는 땅과 더불어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성긴 인연으로 얽혀있다.
 
대성동고분군에 서니 왕릉처럼 넓은 구릉에 가야인의 고분이 널리 산재해 있었음을 본다. 군데군데 토기 파편들도 흩어져 있다. 가을마다 억새꽃이 하얗게 피기에 더욱 적요한 '가야인의 유택'인 것이다. 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봉긋 솟은 봉황대가 멀리 보인다.
 
고분군 앞으로는 대성동 고분박물관이 소재하고 있다. 대성동고분군에서 4차례의 발굴조사로 출토된 자료들을 전시하여 소개하고, 역사 속에 가려져 있었던 금관가야의 실체뿐만 아니라 이곳이 금관가야의 중심지라는 것을 알리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노출 전시관에는 29호, 39호분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 전시해 놓았다. 특히 29호분은 3세기 초의 왕묘로 짐작이 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 패총전시관 입구.
봄볕에 돌돌거리며 흐르는 해반천의 물길을 따라 국립김해박물관으로 간다. 가는 길의 보도블록에서도 가야의 향기가 느껴진다. 파형동기, 칠두령, 동경 등의 문양을 부조한 블록을 깔아놓았다. 박물관에는 '양동리, 가야를 보다.'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금관가야의 국제적 위상을 가늠하게 될 기획전이므로 시민들의 깊은 관심이 예상된다.
 
금관가야를 상징하는 쌍어문양의 박물관 담을 돌아 구지봉으로 향한다. 개나리가 노란 꽃을 피우고, 동백꽃도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굴피를 얹은 대문 지붕을 통해 구지봉을 오른다. 곳곳에서 아녀자들이 한가롭게 봄나물을 캐고 있다. 수로왕탄강지의 봄날 늦은 오후는 이렇게 여유롭다.
 
금강송이 군락을 지었다. 그들의 세월만큼이나 제대로 굽고 휘어 제 일생을 반추하고 있고, 그 사이로 머무는 새소리는 참으로 구성지기도 하다. 뒤돌아보니 분성산과 국립김해천문대, 분산성이 보이고, 그 밑으로 수로왕비릉이 조용히 누워있다.
 
구지봉 중앙에는 한때 '천강육란석조상'이 있었는데, 구지봉이 사적화(사적 제429호) 되면서 수로왕릉 연못 인근으로 옮겨졌다. 때문에 중앙공터는 황량하기만 하다. 다만 그 공터를 누군가 정성스레 빗질한 흔적이 있어 그나마 수로왕의 성스러운 탄강지임을 느끼게 한다.
 
공터 옆에 고인돌이 한 기 있는데, '龜旨峰石'을 새겨놓은 '구지봉석 고인돌'이다. 일설에 의하면 명필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 인제대학교 박물관장 이영식 교수는 '수로왕 탄강을 지켜 본 고인돌로, 청동기시대 때부터 이곳에서 굿판을 벌이며 풍요를 빌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구지봉 전망대에서 보니 지나왔던 길 따라 봉황대와 대성동 고분군이 한 눈에 들어오고, 가야문화축제 리허설을 하는지 대중가수의 노랫소리가 요란하다. 임호산 정상의 임호정도 선명하게 보이고 함박산까지의 유순한 능선도 편하게 다가온다. 경전철 박물관역으로 열차가 들어가고 있는데, 해는 경운산 쪽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Tip. 유하리 마애불
마음을 모아야 서서히 눈앞에 나타나는 불상

김해박물관 앞 해반천 제방 위에 울퉁불퉁한 돌덩이가 2개 있다. 그냥 보기에는 보통 바윗돌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흐릿하게 불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하리 마애불이다. 마음을 한데 모아 집중해야 서서히 현신하는 부처다.
 

   
 
심한 마모로 인해 투박한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는데, 왼쪽은 약함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좌상이고, 오른쪽 것은 아미타여래좌상이다. 불상 주위의 돌을 깊게 파서 광배의 느낌을 나타냈다. 고려후기나 조선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장유면 유하리 산 34-1번지에 있던 것을 장유 배수지 설치공사 때 이곳으로 옮겼다.
마애불 위에는 오가는 사람마다 업장처럼 작은 돌들을 올려놓았는데, 때문에 그들의 업장마저 넘겨받은 마애불의 모습이 더욱 무거워 보인다. 그래도 중생의 건강과 영원한 행복을 꿈꾸는 두 마애불의 희미한 미소는 넉넉하기만 하다.
 
마애불 주위로 아이들은 맑게 뛰어다니고, 산책하는 가족들의 입가에는 웃음꽃이 그치지 않는다. 두 마애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애불 뒤로 해반천이 무심히 흐르고 있다. 바람이 수면을 스치자 하릴없이 물결만 찰랑인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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