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 시인

일제강점기 밀양이 배출한 걸출한 독립운동가 중, 1920~1930년대에 만주에서 조선혁명군의 재정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하다 순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바로 이상관 의사이다. 姓名 : 李禎憲이정헌 異名 : 李相寬이상관. 생년월일 : 1890.4.1. 生. 사망 연월일 : 1936.12.16
 
공적 내용에서 이상관이라는 이름은 1930년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의 추적을 피하고자 개명한 것이다. 1890년 4월 1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서 출생. 1918년 중국으로 가서 이시영(신흥무관학교 창립자)과 함께 생활하며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다. 이시영은 이상관에게 재정관리 역할을 맡겼다. 1922년 밀양으로 돌아와 처, 아들, 동생 등 전 가족을 환인현 건널목 천의 거호구로 옮겨 정착시켰다. 이때 이상관은 39세 나이로 환인현 남구 총관이 된다. 오로지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 자금이나 군량미를 모으는 일에 전념한다. 환인현 남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조선인의 호구 수, 인구 및 생활 실태를 조사하여 군자금을 모아 정의부 재무부에 조달했다. 이러한 군자금은 독립군의 무기와 장비 등 보급품의 개선과 선전 경비에 충당됨으로써 독립군을 강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상관은 전군의 재정이나 군수물자 배급이라는 큰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원리원칙에 의하여 공정하고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관할구역의 광대한 민중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왕청문 지구의 한인 농민들 대부분 양세봉, 이상관 등 독립군과 긴밀하게 왕래, 민회의 십가장 구장 제도를 역이용하여 혁명군에 대해 군자금 납부 군량미 제공 등의 지원 활동을 하게끔 했다.
 
일제와 위만주국 군경은 조선혁명군이 엄중한 형세에 처해 있으면서 활동을 계속 전개하는 것은 재정부장 이상관의 역할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관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금의 현상금을 내거는 한편, 많은 특무원을 파견해 이상관의 뒤를 쫓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다. 당시 남만주에서는 이상관 이름보다는 '혹뿔이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후두부에 달걀 크기의 지방 혹이 달려 있으므로 혹뿔이 영감이 그의 별명이 되었다. 후두부의 혹은 사람들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병원에서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얼굴에는 황산으로 마마 자국을 내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였다. 1935년 가을 부친의 제삿날 동생 경헌의 집에 갔을 때 사람들이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얼굴 수술과 아울러 이때'이정헌'에서'이상관'으로 개명한다. 일제는 이상관 체포를 위한 볼모로 죄 없는 가족을 환인현성으로 압송하여 헌병대 감옥에 가두어 갖은 고문을 하고 가족을 핍박함으로써 이상관으로 하여금 투항하도록 하였다. 1936년 12월 15일 동변도 특별공작부 환인지부 횡도천 공작원 정만기 등이 이상관의 행적을 알아 횡도천 경찰을 앞세우고 이상관을 체포해환인현 헌병대로 압송한다. 그의 체포를 전후한 시기에 조선혁명군의 주요 간부들이 잇달아 체포된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혁명군은 공전의 심대한 타격과 손실을 봤다. 동변도특공작부는 이상관을 비롯한 4명(고이허, 김명암, 홍심원)의 조선혁명군 간부에 대해 잔혹한 고문을 가하면서 투항을 강요하였으나 끝내 이들의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이들 4인을 봉천의 상부 기관으로 끌고 가서 중요한 정보를 캐내고자 하였으나 실패한다. 결국, 이상관을 비롯한 이들 4인은 봉천 북대영에서 일제에 의해 살해(사망 일자 미상)됨으로써 조국을 위해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분들이 독립운동을 안 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가 없다. 선열들이 목숨과 바꾼 독립운동 정신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어렵게 사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의외로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자료 : 독립의사함평이공위상관(정헌) 기적실기-함평이공기적비건립위원회)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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