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갑순 수필가

어둠을 물리치고 다가오는 아침 햇살, 나무들이 울창한 숲 속, 사람들이 활보하는 거리 곳곳에 침묵은 존재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의 언어로 존재를 확인 받고자 아우성이다. 때로는 이념과 진영, 관점의 차이를 넘어, 각자의 알고리즘에 갇혀 끊임없는 주장들이 때로는 진실을 오도하고 있다. 요즈음 이 비대면 상황에서 티비나 유튜브, 사이버 공간에서 생산된 언어들이 타인의 사고를 억압하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 무엇으로 이 혼란을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언어와 만남을 뒤로 미루고 침묵해야 한다. 
 
이 시간 우리는 스스로 저지른 과소비와 환경오염에 인한 전염병으로 감금당하고 있다. 복잡한 지구촌을 향해 잠시 멈추라는 하나님의 경고인가. 사람들이 모이는 곳 어디든지 마치 암흑가 종말과 같은 전염병이 퍼져 나간다. 지구촌은 마스크로 입을 봉하고, 만남을 뒤로 미루며, 서로의 말들을 삼간 채 은둔하라 한다. 만남과 교류를 미루고 긴 침묵을 견디라고 한다. 
 
상가와 학교가 문을 닫고, 필요한 물건들은 사이버로 주문한다. 아이들은 가상공간에서 강의를 경청하고, 가장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재택근무를 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진정으로 부산하고 바빴던 날들을 반추하며 언어들을 줄이고 있다. 전염병이 난무하는 세상의 치유를 위해, 과소비로 파괴된 자연, 지나친 경쟁과 소음에 대해 생각 한다. 억지로 강요당한 침묵으로 자성의 시간을 갖는다. 잠시 친지와 벗들과의 만남을 멀리하고 마음만으로 진정한 격려가 오가기를 원한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를 통해 침묵은 능동적인 존재로서 모든 사물과 모든 풍경 속에 깃들여 있다. 그는 침묵을 말하면서 시골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느슨한 움직임이 도시에서 파괴된 침묵의 씨를 다시 뿌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소란과 잡음의 한쪽에서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묵묵히 침묵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침묵은 그저 쉼이 아닌  반성과 자숙, 더 큰 비상을 위해 고갈된 에너지를 축적하는 일이다. 안으로 고단함과 쓸쓸함을 삼킨 채 비상의 시간을 기다리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을 감수하고 성탄과 연말연시의 왕래를 마스크로 무장하고 말을 줄이고 문을 닫고 침묵해야 한다.
 
침묵의 세계는 존재의 근원을 생각한다. 
 
칠십 팔억 지구촌이 지금 아프다. 열이 나고 죽어가고 있지만 그냥 잠시 멈추라고 종용할 뿐 별 도리가 없다. 이 심상치 않은 사태를, 사이버 공간에서 난무하는 소란스런 언어를 잠시 접고 산책길에 나선다. 혹한을 견디며 침묵하는 겨울나무를 본다. 봉황대의 겨울나무들은 잎과 열매들을 흙으로 돌려주고 빈 몸으로 서 있다. 수세기를 걸러 역사의 희로애락을 품고 찬바람을 맞고 서 있다. 한여름 땡볕과 태풍, 가뭄을 견디어, 가을날 풍성하던 잎과 열매를 모두 다 떨군 채, 새들의 지저귐과 가지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의 숨결, 어둠속으로 달아나는 짐승들의 발자국, 그 잔가지를 부러뜨리며 매달리는 음성을 다만 듣고 있다. 당신과 나와의 사랑과 이별, 아파하는 신음을 침묵으로 지켜볼 뿐이다. 
 
나무들은 침묵의 시간을 지나 봄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따스한 바람이 불고 검은 숲이 가지마다 수액을 올리고, 꽃눈을 터뜨릴 날을 위해 인고의 시간을 버틴다. 침묵의 틈새에서 돋아날 눈부신 새날을 기다리며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 침묵의 중심에 세상을 향한 긍정의 언어들이 확장돼,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좀 더 확실한 백신 보급으로, 지구촌이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고 만남과 여행이 자유로운 새해 새날을 기대한다.     김해뉴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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