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순농원의 대나무숲.
주촌면의 양동마을을 나와 장유면의 냉정마을에서 냉정고개를 넘으면 진례면의 산본마을이 된다. 마침 고압송전탑 성토의 플래카드가 요란한 냉정고개는 김해에서 서부경남으로 나가는 전통의 고갯길이었다. 남서쪽의 용지봉과 북쪽의 매봉산 사이로 난 고개에는 조선시대 역원의 냉천원(<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이 있었고, 근대에 들어 국도1042호선이 지나게 되었으며, 1973년 11월부터는 남해고속도로가 질주하기 시작했고, 2010년 11월에 개통한 신항만배후철도는 냉정JC와 매봉산 밑을 통과하고 있다. 아무리 천지개벽의 토목기술이라지만 전통시대의 지리적 선택은 여전히 유효한 모양이다.
 
도로확장공사가 한창인 고개를 넘고 산본저수지를 지나 진례면 전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산본마을 뒷산에 오른다. 높이 올라갈 필요도 없다. 죽순농원 쯤에서 명품의 대나무 숲을 등지고서 내다 보면 어머니 자궁 같이 생긴 진례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북을 관통해 흐르는 화포천이 진영의 봉화산을 향해 빠져 나가는 북쪽만이 조금 열려 있을 뿐, 동서 양쪽과 남쪽의 모두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자그마한 분지다. 삼면의 산자락에 의지해 화포천 양쪽에 펼쳐진 전답을 경작하던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오른쪽 동쪽라인의 고모리~담안리~송현리에는 이미 수많은 공장이 들어차게 되었지만, 왼쪽 서쪽라인의 청천리~시례리~송정리와 아래쪽 남쪽라인의 신안리~신월리~산본리는 그런대로 봐줄만하다. 가느다란 화포천 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남해고속도로와 신항만배후철도가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진례면의 마을들을 동과 서로 나누고 있다.
 
▲ 70년대 거리 풍경이 느껴지는 진례 상가 거리.
용제산 아래라 산본(山本)이라 했다. 산본마을버스정류장에는 커다란 정자나무 두 그루가 하늘을 덮고 있다. 산본1교차로에서 동쪽라인으로 빠지는 고모로를 버리고 직진하면 진례천을 건너는 신월교(2004년 2월 준공) 양끝에 신월과 관동 마을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있다. 진례천을 따라 내려가면 신월마을의 노인복지·마을·부녀자 회관이 차례로 나타나고, 거슬러 오르면 250년 묵은 곰솔이 환영하는 관동마을회관이다. 관동은 조선시대 관영시장의 관장(官場)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곰솔 앞에 길 쪽으로 허리를 90도 꺾어 절하는 조금 가느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유별나다. 들어설 땐 몰랐는데 나갈 때 보니 너무나 공손하게 절하는 솔의 환송에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관동교 끝에서 왼쪽으로 진례천을 다시 거슬러 오르면 냇가에 관불사와 진사(辰砂)도자로 유명한 운당도예(경남도 최고장인 김용득)가 있고, 조성된 지 160년 되었다는 용전숲이 있다. 진례천 건너에 용전마을회관이 있는데, 용전못을 지나 산 중턱의 용전폭포를 거슬러 오르면 창원과 경계를 이루는 용제(지)봉이다. 용제봉 아래 용전마을에는 고려시대부터 김해와 창원을 연결하는 생법역(生法驛)이 있었다 한다. <경상도속찬지리지, 여지도서·1765년, 김해지리지·1991년> 등의 관련기록과 주변지형으로 보아 아래 서부로에 면한 가야문화예술관 언저리였던 모양이다. 지난 2000년 5월에 폐교된 신월초등학교(1969~1994년)를 리모델링해 국악, 서예, 염색, 도자기, 다도 등의 전통문화와 감따기, 고구마굽기 등의 자연체험을 지도하는 가야문화예술관(송성호 이사장)은 연 6만여 명이 찾는다 한다. 17년 동안 학교가 배출했던 671명의 졸업생에 비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다.
 
▲ 남해고속도로를 기준으로 자연 그대로의 왼쪽 논과 경지정리된 오른쪽 논이 대비된다.
가야문화예술관 앞 화전마을버스정류장에서 서쪽으로 신항만배후철도 아래를 지난다. 직진의 서부로를 버리고 왼편의 진례로, 그러니까 면사무소로 들어가는 구 도로를 택한다. 삼거리를 건너다 오른쪽을 돌아보니 엊그제 한국토목학회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진례교의 아치가 들판너머에서 곡선을 뽐내고 있다. 남해고속도로 위를 비스듬히 가로질러야 하는 문제 때문에 고속도로와 직교하는 철교를 만들어 왼쪽으로 이동시켜 연결했던 최신 공법이기 때문이란다. 예사로 보아선 안 될 구조물인 모양이다. 진례로 양쪽의 묘한 대비가 눈길을 끈다. 오른쪽 논은 직선이고 왼쪽 논은 곡선이다. 경지정리를 했느냐 안했느냐의 차이다. 그 이유를 확인치는 못했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다. 오른쪽에서 긴장하던 시선이 왼쪽에서 편안해짐은 분명한 사실이다. 곡선의 논두렁을 직선으로 펴서 얻은 효율은 우리의 신경이 닳아 헤졌던 희생에 대한 작은 대가일 뿐이다.
 
진례로 왼쪽의 신안마을 표지석을 따라 들판을 가로질러 신안교에서 화포천을 건넌다. 마을 끄트머리에는 높이 10m 지름 5m의 거대한 고인돌 같이 생긴 입석이 있다. 혼자 있다 해서 외톨바위로 불린다는데, 공기놀이를 하던 선녀가 떨어뜨린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진례로41번길이 이 바위를 피해 돌아가는 이유를 알겠다. 밭 가장자리에 뒤가 돌들로 불룩한 것을 보니 흔히 '말무덤'이라 부르는 것 같은데, 발굴조사의 욕심이 간절하다. 외톨바위를 지나 차 한 대 겨우 지나는 다리를 건너는데, 제동이 잘 안되는지 경운기 한 대가 막무가내로 내려온다. 형편을 보아하니 내가 후진해야 할 모양이다. 경운기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축대 언덕 위에 노거수 두 그루가 올려다 보이는 신안노인정(1995년 4월 준공)에 오른다.
 
노인정 뒤에는 멋진 소나무 몇 그루가 둘러싼 깊은 바위 못이 있다. 소나무 송(松), 깊은 못 담(潭)의 송담이다. 임진왜란 때 김해를 지키다 순절한 이 마을 출신의 송빈(松賓) 선생과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의 세 분을 함께 제사하던 송담서원이 있었던 곳이다. 1716년(숙종42)에 창건된 송담사(松潭祠)는 1763년(영조39)의 중수를 거쳐 1801년(순조1)에 훼철되었으나, 1824년에 송담서원(松潭書院)으로 복구되었다. 1833년에 표충사(表忠祠)란 현판도 내려졌지만 1868년(고종5)에 철거되고 터만 남았다. 노인정을 포함한 뒤쪽 공간이 그 자리였던 모양이다. 바위 벼랑 위에는 소나무를 머리에 이고 이수와 비좌를 갖춘 삼충대(三忠臺, 1896년, 높이55㎝, 너비40㎝) 비가 있다. 120년이 못 되었는데도 뒷면은 읽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었다. 역사조차 쉽게 잊는 우리 같다는 생각이 드는 차에 시멘트 쌍무지개 다리 앞에 핀 한 그루의 매화가 세 분의 지조와 단심처럼 느껴졌다.
 
신안마을노인회가 향어와 잉어를 양식하는 신안(화성)저수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무송지(茂松池), <김해읍지 1928년·국립지리원지도 1981년·김해지리지>에 무송저수지로 각각 기록되었다. <김해읍지>는 1천872척(약 562m)의 둘레를 전하고, <김해지리지>는 노인정의 노거수를 저수지의 정자나무로 기록했다. 감나무가 슬레이트 지붕을 뚫고 나온 집이 있는 아래무송마을을 지나 경전선 철도를 따라 이제 막 놓인 진례2교를 건너 윗무송마을로 들어선다.
 
인기척 없는 무송회관을 지나 마을표지판이 있는 평지길에 나서 유(U)턴하듯 위쪽의 평지마을을 향한다. 앞길이 이내 어수선한 공사현장으로 변해, 왼쪽 아래를 내려다 보니 한참 깊고 거대한 진례저수지의 증축공사가 한창이다. 120결(11만8천800㎡~47만1천900㎟)이나 되는 논에 물을 댔다는 <경상도속찬지리지>의 진례촌제(進禮村堤)를 엄청나게 키우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농업용수가 더 필요한 것은 아닐텐데, 아마도 진례복합레저스포츠단지 조성에 따른 상수원의 확보가 목적인가 보다. 우리의 끝없는 욕심은 저 아래 평화롭게 펼쳐져 있는 들판과 골짜기를 또 한 번 뒤집어 놓을 모양이다.
 
저수지 위에는 평지가 아닌 평지마을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 평(坪)의 땅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1988년의 도로포장 이래 '백숙촌'으로 유명해졌다. 적지 않은 닭백숙집이 성업 중인 모양인데, 맨 위에 자리한 관음정사의 관음보살상은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관음보살 마음도 그렇겠지만, 여기가 바로 화포천의 발원지란 점이 더 마음에 걸린다. 절 뒤쪽 고개를 넘으면 창원 사파동인데, 이쪽 소리가 날아 고개 넘어 저쪽까지 들린다고 해서 '소리가 나는 고개'란 뜻의 비음령(飛音嶺)이라 불린다.
 
▲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진례저수지 증축현장.
평지길을 내려오며 선아도예(국가기능장 강호룡)를 지나 기와지붕의 향초수퍼가 있는 삼거리에서 진례로를 만난다. 슈퍼 옆으로 화포천을 건너면 초전마을이다. 대추가 많아 대추나무 조(棗), 밭 전(田)의 조전마을이 센 소리의 초전마을로 변한 모양이다.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다보니 넓은 뜰 안에 갇힌 섬 같은 느낌이다. 마을 뒤 정사각형의 초전저수지를 지나니 화포천 가에 150년짜리 느티나무가 서 있다.
 
초전교를 건너 다시 진례로에 나선다. 200년 묵은 회화나무의 초전마을회관(1984년 8월 준공)이 있고, 송화도예(이한옥)와 가람도예(주은정)를 지나 산월교를 건넌다. 산월마을버스정류장 앞 마을표지석에서 왼쪽의 진례로147번길로 접어든다. 몇 개의 공장과 서광도예(서재경)·진영도예(김정만)를 지나면 산월마을회관이다. 마을회관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논 한가운데에 진례토성의 흔적이 남아있고, 조금 더 가서 왼쪽으로 꺾어 들면 토성저수지가 있다. 모두 가락국의 수로왕이 왕자를 진례성주로 봉했을 때 쌓았다는 방형의 토성과 관련된 유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김해지리지>는 토성 상봉(上峰)의 첨성대와 별을 보는 곳이라 비비당(단)이라 했다는 기록을 전하면서, 토석혼축의 흔적이 남아있어 지금도 첨성산으로 부른다 했다. 짧은 시간이라 확인은 어려웠지만 저수지 옆에 솟은 낮은 봉우리가 의심스러웠다. 예정된 발굴조사의 성과를 기대한다.
 
▲ 선아도예.
토성지 서쪽에 보이는 비음산에는 신라 말의 기록에 등장하는 진례산성이 있다. 둘레 4㎞ 정도의 포곡식 산성으로 진례와 창원의 양쪽에 걸쳐 쌓은 석축성이다. 신라말의 호족인 김인광과 김율희 등이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진례성의 군사권을 인정한 칭호)를 내세우며 군사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924년에 김율희가 가야왕족의 후예인 김해김씨의 진경대사(眞鏡大師)를 모시고 창원의 봉림사를 세워 선종 9산(봉림산문)의 일각을 구성했던 사실은 국사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산월저수지를 지나 용추고개를 넘으면 봉림사가 되고 창원대가 된다. 토성지에서 농로를 따라 송정리의 도강마을로 넘어가면 서쪽 골짜기에 도강지(道岡池, 1939년)가 있고, 진례로223번길을 따라 효원도예를 지나고 들판을 다 내려가 진례로에 나서기 전에 진례성당이 있다. 1954년의 미사를 시작으로 1989년에 소박한 단층건물이 준공됐고 1998년에 진례(준)성당으로 승격했단다. 권창현 신부와 약 335명의 신자들이 신앙공동체의 활성화와 지역의 복음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길모퉁이의 '송세훈면장선정비'(1988년 중수)를 흘겨보다 면사무소로 향한다.
 
▲ 소나무와 깊은 바위 못이 절경을 이루는 송담.
진례파출소~면사무소~진례농협에 이르는 길은 60~70년대 신작로변의 풍경 그대로다. '전기모타·오토바이·장의사·청과·열쇠문구·옷수선·유리철물·다방·이용원·반점·약국' 등의 알록달록한 간판을 단층 슬레이트지붕에 얹은 상가들이 추억의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붉은색, 흰색, 청기와로 혼자 돋보이는 3층의 면사무소(1989년 12월 준공)에서는 유정연 면장 이하 12명의 직원들이 3천546세대 8천77명(남 4천278명)의 면민을 돌보고 있다.
 
면사무소를 나서 송현로를 따라가는데 앞차에서 마구 손을 휘젓는다. 내가 역주행인 모양이다. 진례우체국, 성우아파트(1992년 6월 준공, 110세대)·진례작은도서관·진례교회·진례탕이 있고, 왕버들의 둔덕교를 건너 상둔덕마을에 들어서면 왼쪽에 서인백조아파트(1992년 7월 준공, 128세대), 오른쪽에 동원아파트(1995년 12월 준공, 150세대)와 송정아파트(1999년 12월 준공, 72세대)가 있다.
 
1926년 3월에 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진례초등학교는 지난 2월 83회 1만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4학급 320명(남171)의 학생들이 정춘권 교장 이하 37명의 교직원들과 공부하고 있다. 클럽활동을 통해 국제이해교육을 실시하는 유네스코협동학교로서 외국인선생님들의 수업도 적지 않다. 맞은편에 진례중이 지척이지만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찾지도 못한 초전미륵불 때문에 시간만 허비했다. 다음번 출발지로 삼을 수밖에 없겠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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