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은 각 지역의 향토문화창달을 위해 문화 및 사회교육사업을 실시하는 비영리 특수 법인체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여 개가 넘는 문화원이 있다.
김해문화원은 1956년 개원했다. 김해문화원의 발전을 위해 역대 원장들과 회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중에서도 작고한 9~11대 원장 이병태(1923~2005) 씨의 업적은 특히 남다르다. 그는 김해문화원의 내실을 구축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김해의 향토 사료와 사적을 수집, 정리한 이 원장의 활동 결과물들은 오늘날 김해의 옛 모습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이병태 원장은 또한 평생을 '김해사랑'으로 보낸 진정한 '김해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작은 유적까지 직접 발로 뛰며 기록
모은 사료·고문서·책 집안 가득
'왕조실록 김해사료집' 등 자료 펴내
김해문화원 튼튼한 뿌리 일등공신


"이병태 원장님은 소학교 시절 수로왕릉을 방문해 그림을 그렸다. 마치 사진으로 촬영을 하듯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렸다. 능의 모습은 물론, 비석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그렸는데, 원장님은 그 그림들을 평생 간직하셨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향토사에 관심이 많았고, 무엇이든 자료가 되는 것은 수집해 정리하고 보관하는 데 철저했다."
 

▲ 고 이병태 전 김해문화원 원장 근영. 사진 제공=김해문화원
이병태 원장을 아는 사람들은 이 원장의 유년 시절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병태 원장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나고야 시립상업학교와 와세다대학 전문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향토사료를 더 적극적으로 찾았다. 대동면 호적계장(1946. 8~ 1948.11), 김해공립농업중학교 교사(1948.11~1950.9) 시절에도 김해를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1951년부터 1971년까지는 장유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국사를 가르쳤다. 장유중학교 졸업생들에겐 '국사를 재미있게 가르쳐 주었고, 김해 관련 역사를 열성적으로 가르쳐 준 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원장은 1989년까지 장유학원 원로교사, 상무이사,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그러면서 경남향토사연구협의회장과 김해가야문화연구회장을 맡아 향토사 정립을 위해 일했다.
 
이 원장의 집에는 직접 모은 향토사료와 고문서와 책들이 가득했다. 방문과 창문을 빼고는 온통 책이었다고 한다.
 
"이병태 원장님은 늘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김해'라는 지명이 있는 기록을 모두 찾아 정리하셨지요. 요즘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가 있어 컴퓨터로 원하는 항목을 편하게 검색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일일이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원장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찾은 자료로 '왕조실록 김해사료집'을 펴냈습니다. 조선왕조실록뿐만 아니라, 구할 수 있는 고문헌을 모두 찾아보셨고, 일본 사료와 중국 사료까지 살펴보셨지요. 김해의 향토사료를 찾기 위한 문헌연구에는 철저했습니다."
 
1986년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김해문화원에서 일한 허모영 전 사무국장이 회고하는 이 원장의 모습이다.
 
허 전 사무국장은 이병태 원장이 취임해서 퇴임하는 날까지 이 원장을 보조했다. "원장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제시간에 출근하셨고, 책 읽고, 자료 찾고, 원고를 쓰셨습니다. 신문이나 잡지를 볼 때도 늘 스크랩을 하시면서 향토사 관련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제 기억 속에 이병태 원장님은 학자였고, 지극히 인자한 분이었습니다."
 
허 전 사무국장은 오래 전의 여름풍경을 들려주었다. "원장님은 문화원 원장으로 취임하기 전에도 문화원에 강사로 나오시곤 했습니다. 류필현 원장님 재임 시절, 1980년대 말이었습니다. '청소년 하계 문화강좌'는 지금 생각해도 문화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강좌가 아니었나 여겨집니다. 정말 멋진 행사였습니다."
 
한여름 수로왕릉 후원 버드나무 그늘에서 이병태 원장은 김해의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향토사 강의를 했다. 수로왕릉에서 직접 펼쳐지는 강의에 중학생들은 집중했다. 책상 앞에서 하는 지루한 강의가 아니라 고대 가야의 왕이 잠든 수로왕릉 앞에서 이루어진 강좌는, 탐방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서 귀에 쏙쏙 들어오는 참 역사공부였다고 한다.
 
이병태 원장은 유머와 위트 감각이 넘쳐서 한 마디 한 마디가 재미있었고 의미 또한 깊었다고 한다. 허 씨는 재미있는 표현 가운데 하나로 단골 선거 출마자들을 두고 한 '만성출마병환자'를 들었다.
 
전국의 문화원들 중에서 김해문화원이 향토사 재조명 부문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이 원장의 노력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이병태 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온 이강식 전 사무국장의 말이다.
 
"이병태 원장님은 <김해읍지>나 <동국여지승람> 등에 나온 김해 관련 기록을 토대로 김해의 사적과 작은 유적까지 모두 현지답사를 했습니다. '김해금석문총람'을 만들 때는 원장님이 어디 가면 어떤 비석이 있다고 자세하게 일러주셨고, 가 보면 그 자리에 비석이 있었습니다. 원장님께서 200군데가 넘는 곳을 일일이 1차로 현지답사를 했기 때문에, 저는 별 어려움 없이 비석을 찾아 탁본을 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동안 김해 향토사에 애정을 가지고 활동했기에 김해 지역에서 많은 존경을 받은 분입니다."
 
▲ 김해문화원과 '일본 마에바루시 국제교류협회'의 한·일 문화교류 조인식에 참석한 이병태 전 원장(왼쪽)
허 전 사무국장은 "10년을 모시는 동안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났습니다. 평생 김해를 위해 연구하고, 향토사를 바로 전하기 위해 일하시던 이병태 원장님을 김해사람으로서 존경합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으로서 김해의 참어른께 고마운 마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병태 원장 시절, 김해문화원은 많은 일을 했다. 1991년 4월 '전국가야금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1997년 대상을 대통령상으로 격상시키며 김해문화원과 가야금대회를 전국적으로 알렸다. 1994년 정월대보름날에 달집태우기와 민속행사를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6년부터 민속자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해 현재 1천여 점의 자료를 '민속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김해가락오광대'를 발굴해, 1996년에는 경상남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1997년 전국대회에서 장려상을 받는 성과도 올렸다. 1997년 한글날, 한뫼 이윤재 선생을 추모하는 한글백일장을 개최해 현재까지 시행하고 있다. 1998년에 개강한 문화학교는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999년에는 전국문화기반시설 관리운영평가에서 우수문화원으로 평가받았다. 이병태 원장의 노력이 거름이 돼 김해문화원은 지난 2010년 '대한민국 문화원상 종합경영부문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병태 원장은 지난 2005년 11월 21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해금석문총람·김해지리지·김해지명변천사·김해충효열지 …

이병태 원장이 수집한 향토사료
200여군데 넘는 옛 비문 현지답사 후 탁본
지세·지명·유적 사료와 구전 책으로 엮어

이병태 원장이 수집한 향토사료들은 김해문화원에서 책으로 출간됐다. '김해금석문총람'은 김해지역에 산재한 옛 비문을 탁본해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다. 다른 지역의 문화원에서는 비석의 사진만을 찍어 책으로 펴내는 경우가 많은데, 김해문화원에서는 이병태 원장이 200군데가 넘는 곳을 모두 1차 현지답사를 하고, 이강식 사무국장이 직접 탁본해서 책으로 엮었다. 김해의 지세·지명·유적에 관한 사료와 구전을 모아 펴낸 '김해지리지'에는 부산으로 편입된 강서지역까지 포함돼 있다. '김해지명변천사'는 김해지역 곳곳의 지명과 그 이름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밝히고 있다. '김해충효열지'는 김해 사람으로서 충·효·열을 행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각 마을에 남아있는 비를 일일이 찾아 사진을 촬영하고 위치와 내용 등을 담았다. 그 외에도 다수의 책을 펴내 향토사 발굴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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