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촌면 양동리와 내삼리 경계의 산봉우리에 퇴뫼식으로 쌓아올린 양동산성. 문헌에는 '가곡산성'으로도 표기돼 있다. 불모산이 지척에 보이고 낙남정맥의 능선이 활개를 펴고 김해를 보듬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사진/최산·여행전문가 tourstylist@paran.com
봄의 길목, 따뜻한 햇살 아래 호젓한 임도를 걷는 것만큼, 기꺼운 일도 또 없을 것이다. 싱그러운 바람 맞으며, 산길 한 모롱이 한 모롱이 돌아들 때의 여유로움은, 봄을 가슴에 담는 일과 다름 아니다. 이번 산행은 주촌면 양동리를 감싸고 있는 양동산성과 매봉산 능선을 오른다. 보현행원을 들머리로 시작해서 능선임도~양동산성~능선임도~매봉산~양동리 공동묘지로 하산하는 원점회귀코스이다.

보현행원 입구 공터에 차를 댄다. 초입부터 쑥과 질경이, 딸기나무 등속에 푸른 잎이 한창 돋는다. 그 잎들이 봄볕을 받아 반짝반짝 윤이 난다. 밭둑 가로 냉이꽃이 하얗게 무리지어 피었다. 시멘트 도로 틈새로 쑥이 머리를 들이밀며 봄을 알리고, 붉은 황토 흙속으로도 봄은 윤택하게 묻어 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온통 꽃밭이다. 보라색 제비꽃과 파란색 개불알풀, 노란색 양지꽃 무리들이, 한창 서로 어우러져 형형색색, 올망졸망 산야를 뒤덮고 화들짝, 화들짝 피어나고 있다.
 
산성 오르는 길은 꼬불꼬불해서, 어슬렁거리며 오르기 안성맞춤이다. 어슬렁거리며 한 모롱이 휘돌아 돌자, 갑자기 눈이 시리다. 벚꽃 몇 그루가 하얗게 절정의 꽃을 피워내며 길손을 반기는 것이다. 양동산성 능선을 바라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참나무들의 늦은 단잠을 깨우고 있다.
 
조금 더 오르다 뒤돌아보니, 칠산벌이 서서히 열린다. 그 앞으로 길게 드러누운 칠산이 보인다. 편안한 산세가 여유로운 봄날과 잘 어울린다. 길 곳곳에는 개미들이 굴을 파고 집을 짓느라 분주하다. 개미집을 피해 진달래 핀 꽃길 따라 사부작사부작 계속 걸어 오른다.
 
능선 따라 난 임도와 합류한다. 휘휘 돌아드는 산길을 한 구비, 한 구비 돌 때마다 오리나무 잎사귀의 싱그러운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눈앞으로는 양동산성 정상과 맞은 편 매봉산의 매서운 산세가 선명하다. 터덜터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하릴없이 걷는 발걸음이 느긋해서 좋다. 그렇게 봄볕과 함께 걷는 것이다.
 

▲ 양동산성 오르는 길에서 만난 벚꽃 몇 그루. 눈이 시리도록 절정의 하얀 꽃을 피워낸 채 드문드문 찾아오는 산객을 맞이하고 있다.
길게 돌아드는 임도를 잠시 버리고 작은 봉우리 쪽 능선을 탄다. 발아래로 참나무 낙엽들이 제대로 말라 바스락대고, 분홍색 멍석딸기 꽃들은 소담스레 피어 따뜻한 봄볕 속에 졸고 앉았다. 발아래로는 임도가 능선을 따라오고, 능선을 오르는 나그네들은 마지막 '깔딱 고개'를 넘는다.
 
작은 봉우리에 도착하니 이정표가 일행을 반긴다. 황새봉 2.6km, 양동산성 1.0km를 가리키고 있다. 봉우리에는 상큼한 풀냄새로 온통 푸른 물이 들었다. 봄물 오른 땅의 기운이 역동적이다. 주위를 바라본다. 장유 쪽으로 낙남정맥의 능선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다. 용지봉, 불모산, 굴암산 등이 보이고, 양동산성 정상부와 매봉산이 서로 마주보고 그 기세를 겨루고 있다.
 
봉우리에서 길을 내린다. 길가로 초록의 잎새들이 제 잎들 피워내느라 소란스럽다. 부엽토 흙길을 밟으니 푹신푹신하여 마치 쿠션 위를 걷는 것 같다. 흙의 촉감이 고스란히 몸으로 전달된다. 다시 임도와 만나자마자 삼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내삼저수지 2.3km, 냉정마을 3.4km, 양동산성 0.8km. 양동산성으로 방향을 잡는다.
 
▲ 보현행원 입구 쪽에서 산길을 오르다 깔딱고개를 넘어 작은 봉우리에 도착하면 만나게 되는 이정표. 황새봉과 양동산성 쪽을 표시하고 있다.
산성길 입구. 제법 잘 조성된 임도 사이로 잘 뻗은 소나무 군락이 빽빽하다. 신라의 어느 왕릉 입구를 들어서는 느낌이다. 솔밭 길을 걸으니 바람이 다르다. 서늘한 기운이 들어 이마의 땀을 식혀준다. 솔방울이 계속 발에 차이는데, 고개를 들면 진달래꽃 천지다. 딱따구리 한 마리 멀리서 '따르르르…' 나뭇가지를 시끄럽게 쪼고 있다.
 
곧이어 또 임도를 버리고 봉우리를 오른다. 능선을 넘을 때마다 진달래 군락은 자지러지고, 색깔도 더 화사하고 곱다. 소나무 밑으로 붉은 꽃 바다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꽃길을 걸으며 모롱이 모롱이마다 여유로운 발걸음을 즐긴다.
 
다시 임도와 만난다. 계속되는 오르막. 솔 숲 사이로 양동산성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양동산성에 도착한다.
 
양동산성(良洞山城). 주촌면 양동리와 내삼리 경계에 위치한 산봉우리를, 테뫼식으로 쌓아올린 산성이다. 일부는 흙으로 쌓고, 일부는 대강 다듬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문헌상 '가곡산성'으로도 불린다. 김해평야와 낙동강 하구를 효과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 분산성과 더불어 김해를 지키던 곳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91호.
 
산성은 복원공사가 중단된 상태로 방치되어 을씨년스럽다. 군데군데 어지러이 뒹구는 돌덩이와 바람에 펄럭이는 천막조각 등이 폐성지(廢城址)의 허허로움을 자아낸다. 그 와중에도 허물어진 성터 위에 누군가가 몇 개의 돌탑을 쌓아놓았다. 돌 하나에 정성 하나면 이 돌탑에는 얼마나 깊은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인가?
 
산성 정상 삼각점에 선다. 불모산이 바로 눈앞에 보이고, 낙남정맥의 웅장한 능선이 활개를 펴고 김해를 보듬고 있다. 곳곳의 두릅나무에는 두릅 순이 알알이 맺혔다. 하나 따서 입에 넣는다. 풀냄새 뒤에 고소한 맛이 든다. 그래도 입에 남는 쓴 맛은 내내 입 속을 감돈다. 이렇게 봄을 준비하기란 쓰디 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리라.
 
▲ 노란색 양지꽃.
탑돌이 하듯 폐허의 산성을 따라 돌아든다. 산성 안은 오로지 진달래꽃들만 불타고 있을 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조금 돌다보니 허물어진 옛 산성과 새로 복원한 산성이 서로 만난다. 축성의 공법이야 문외한이 알 수는 없으나 과거와 현재의 극명한 대비가 묘한 여운을 자아낸다.
 
복원한 산성 위에서 멀리 띠를 두른 듯 서있는 분산의 산성을 바라본다. 김해의 산성에서 또 다른 김해의 산성을 바라보니 '쇠바다'를 지키는 두 산의 결기가 느껴져, 보는 이조차 결연해지는 마음이다. 고개를 들어 경계를 조망한다. 왼쪽으로 주촌의 두 봉우리 주주봉과 소황새봉이 여인의 젖가슴 마냥 봉긋하게 솟아있고, 그 뒤로 경운산, 임호산 사이로 김해 시가지가 보인다. 첩첩이 쌓인 산들 뒤로는 부산의 금정산 고당봉이 아스라하다.
 
조금 더 내려가자 주촌 양동리 일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한동저수지의 푸른 물길과 칠산의 부드러운 능선, 장유 반룡산과 장유신도시, 남해고속도로가 조망된다.
 
양동산성을 뒤로 하고 느지막한 봄 햇살을 맞으며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 진달래꽃은 더욱 붉어지고 바람도 소슬하게 불어온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시원하게 가신다. 왔던 능선길을 두고 임도 따라 매봉산 쪽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길게 휘돌아드는 임도에서, 되돌아 왔던 임도를 바라보니 산성 정상부 마루금이 따뜻하다. 이미 성곽은 산에 묻혀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쇠바다'를 지키는 산성 하나가 크게 자리 잡고 있을 터이다.
 
임도와 만나는 하산 길을 버리고 계속 직진, 매봉산 입구까지 간다. 삿갓 모양의 매봉산 급한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다. 사람 발길이 닿은 지 오래된 탓에 곳곳이 찔레 가시덤불이고, 관목들에 쳐진 거미줄이 내내 사람 얼굴에 달라붙는다. 날벌레도 계속 앵앵대며 귀찮게 하고, 두릅나무 가시도 사람 팔목을 잡아채 버겁기만 하다.
 
▲ 봄의 무르익고 있는 산에는 보라색 제비꽃과 파란색 개불알풀, 산을 태우 듯 붉은 진달래꽃 무리들이 형형색색 올망졸망 온산을 수놓고 있다.
한참을 오르니 길섶으로 연리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자세히 보니 보통 연리목이 아니다. 참나무와 오리나무가 교접한 연리목이다. 오리나무는 벌써 제 잎들을 피워 연두색 드레스를 걸치고 있고, 참나무는 아직 겨울의 검은 외투 그대로 오리나무의 아름다운 몸매를 사뿐히 감싸고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탱고를 추듯 서로에게 안겨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깊은 교접으로 서로의 푸른 피를 나누고, 서로의 부드러운 속살을 나누며 말이다. 바람이 불자 열정의 탱고음악이 들리는 듯하다.
 
길을 막는 가시덤불들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길 여러 번. 사람이 낸 길조차 곧바로 다시 숨겨버리는 자연의 복원력에 새삼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갖은 고생 끝에 매봉산 정상에 도착한다. 정작 매봉산 정상에 섰지만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다. 자칫하면 정상인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겠다. 주위 조망도 잡목림에 싸여 쉽지가 않다. 다만 정상 아래에 전망대가 있어, 매봉산 줄기와 김해벌이 간간히 나무 사이로 보일 뿐이다.
 
다시 왔던 길로 덤불을 헤치며 하산을 한다. 내려오다 나무 밑동에서 10여 개의 나무줄기가 곧게 뻗어 오른 소나무를 만난다. 다복솔이다. 참 탐스럽고 소복하다. 말 그대로 다복한 나무를 보며 길손의 마음마저 풍성해진다.
 
매봉산 안부에서 임도를 버리고 공동묘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제대로 된 길이 없어 무덤 주위로 조심스레 길을 내린다. 군데군데 고사리가 주먹 꼭 쥔 채, 땅을 박차며 일어서고 있다. 그 당차고 씩씩한 모습에 미소가 흐른다. 그 주먹 속에는 또 어떤 당찬 일생의 손금이 일어서고 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오늘 매봉산도 손금을 새로 긋듯 길을 내며 간 산행이다. 그래, 매봉산 산행을 고사리 길이라 불러야겠다. 괜히 고사리가 씨익~ 웃는 듯하다.


Tip.시한편 ─

▲ 산행 중 만난 진달래 꽃에 흠뻑 취한 최원준 시인.
고사리 /최원준

그대만큼 내 아이를 닮았을까요?
자기 손금 누가 볼세라,
주먹 꼬옥 쥐고 펴 주지 않던 내 아이처럼,
그대 땅 속의 기지개도,
주먹 쥔 채 숨겨놓은 손금이네요.
그 손금 속에는,
겨우내 쥐며느리와의 사랑도 있고,
홀씨 같은 자식,
바람에 날릴 때의 소망도,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을 테지요.
부디 험한 땅 위 세상,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고,
주먹 불끈 쥐고 일어서는 품이,
내 아이처럼 가상하네요.
그늘에 숨어 두 손바닥 살며시,
그대 운명 펼쳐 보여주지만,
나로 하여금 허리 한풀 꺾어,
그대 마중하게 하는 것마저,
이미 낯설지가 않네요.
결국 펴보이고야 말 손바닥의 손금이지만,
잠깐쯤은 숨길 줄도 아는 그대의 지혜로움이,
보고 싶은,
내 아이처럼 새롭습니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