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김동창 옹은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 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포로로 잡힌 뒤 다시 국군 신분으로 전쟁에 나서게 된다. 사진은 김동창 옹이 포로 신분으로 일시 머물던 부산의 UN포로수용소
김해시 삼계동 김경희(49·여)씨가 27일 타계한 아버지 김동창(향년 78세)씨의 일대기를 보내왔습니다. <김해뉴스>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고도 성장기를 온 몸으로 겪어낸 그의 이야기를 3차례로 나눠 싣습니다. 평범한 개인들의 삶일지라도 후세에 좋은 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김해뉴스>의 믿음입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독자 여러분의 투고를 환영합니다.


낙동강 전투 생사 넘나들어… UN 참전 후 패퇴 거듭
함경도 인근서 국군에 생포 부산 거쳐 거제도까지 이송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고 언젠가는 무력통일을 감행하겠다는 생각으로 소련제 무기를 도입하고 전쟁 준비에 온 힘을 다하고 있던 중 1950년 드디어 6·25 남침을 감행했다.

김일성은 국민들에게 남쪽에서 북침을 하였으니 우리도 총궐기를 하여 대항해야 한다는 선전으로 국민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젊은 사람들은 강제 징발돼 총부리 앞으로 내몰렸다. 그해 7월 말 가족 중 처음으로 큰 형님께서 36세 나이로 인민군에 강제 입대하셨다. 8월 초, 나 역시 직장에서 강제징발 됐다. 당시 나이는 19세. 광산에서 트럭으로 고성역까지 가는 도중 집 앞을 지나게 됐다. 밭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밭에서 실신하셨고 난 그 광경을 보고도 지나쳐야만 했다.

정신을 차리신 어머니는 2km 떨어진 역까지 달려오셨다. 밖에서 치맛자락에 눈물을 닦고 계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절하였는지 잊을 수 없다. 인솔 군인들은 눈물 흘리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향해 조국을 위해 입대하는데 웬 눈물이냐며 발길질을 가했고 총머리로 사정없이 구타했다. 그들을 피해 도망치던 그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전쟁 후 국군 동료들과 포즈를 취한 모습
집결소에서 우리는 병과별로 분류되었다. 나는 고학력자이고 공무원 생활과 직장 사무직으로 근무한 경력으로 장교후보생에 선발되어 단기 장교 훈련소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매일 같이 발용산(함흥)에서 받는 고된 훈련과 행군의 고통은 어린 소년의 몸으로는 견디기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렇게 3주가 흘러 임관날이 됐다. 나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장교에 임관됐다.

첫 배속부대는 남한 점령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부대인 내무정 직속 316 부대였다. 배속을 받기 위해 도착한 평양에는 각 도에서 집결한 군인들로 북적북적했다. 나의 배속지는 경북 선산군. 그렇게 나는 고향에서 평양, 평양을 출발하여 남으로, 남으로 선산까지 오게 되었다.

전선은 고착됐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피 비린내 나는 전투는 계속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는 전투에 투입됐다. 그것이 유명한 낙동강 전투다. 강물이 온통 붉은 물로 얼룩져 졌다. UN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전황은 국군쪽으로 기울었다. 인민군은 군력이 약해져 북으로 후퇴하게 됐다. 우리는 패잔병 신세로 전락해 뿔뿔이 흩어졌다. 평양까지 집결하라는 지령을 받고 굶어 가면서 북진을 시도, 그해 10월 10일께 평양에 도착하게 됐다.

1950년 10월 19일 UN군은 평양에 입성하였다. 아침 7시 1급 공습경보가 울렸다. 국군이 대동강까지 진격해왔으니 평양을 반드시 사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부대는 바로 대동강 입구에 포진했다. 김일성은 이미 10여일 전 평북 강계로 도망치고 없었다. 후방지휘부도 이미 도망가고 없으며 최전방 병력들만 힘겹게 싸웠으나 독안에 든 쥐였다. 도망치는 수 밖에 없었다.

▲ 전쟁 후 국군 동료들과 포즈를 취한 모습
국군은 평양을 탈환하였고 국도를 따라 북으로 진군해 왔다. 패잔병인 우리는 낮에는 산으로 들어가 숨어 지냈고 밤이면 농가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훔쳐 겨우 배를 채웠다. 하지만 겨울의 산은 너무 추웠다. 차라리 내 총으로 머리를 쏴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평안북도 박천에 지나 드디어 진달래꽃이 유명한 영변 묘향산에 도착했다. 산중 오막살이 집 한 채에서 동료 8명과 함께 여독을 풀었다. 정신은 잃고 자다 갑자기 치안대의 기습을 받았다. 야산으로 도망쳐 올라가 보니 동료 중 겨우 3명만 남았다.

한숨을 돌린 뒤 다시 후퇴였고 이번엔 영원에 이르렀다. 인민군의 집결지로 패잔병들이 모여 다시 병력을 재정비하는 곳이었다. 물론 군사재판도 이루어졌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망을 치다 붙잡혀 온 이들이 여기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도로변과 산 허리 등에는 무참히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아수라장이 되었다.

드디어 신흥군에 이르렀을 때다. 우리는 국군의 포위망 속에 잡혔고 전투가 벌어졌다. 곧 국군이 마이크로 투항할 것을 권했다.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져 손을 들고 투항할 수 없었다. 고민 하던 나의 머리 위로 차가운 총부리가 얹어졌다. 총성은 멎었다. 오후 4시경 산의 해가 질 무렵이었다.

미군과 한국군이 무장해제를 시켰다. 나는 비참한 포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배고픔에 죽을 것 같으니 밥을 달라고 하였다. 간단한 음식을 주었고 그것을 먹으니 살 것만 같았다. 포로들과 함께 미군의 트럭을 타고 연대본부에 도착했다. 그곳으로 가니 나와 같은 포로들이 수 백명이 있었다.

그날부터 고문은 시작되었다. 인민군의 군사정보를 얻기 위한 심문이었다. 나는 군관이라 하여 더욱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야전침대에 말려 몽둥이질을 당했고 빨래줄 고문은 물론이거니와 엄동설한에는 맨발로 물뿌린 콘크리트 바닥에 세워놓는 고문들까지….

식사는 겨우 주먹밥 하나로 세 끼를 때웠다. 배고픔이 가장 큰 고문이었다. 며칠이 지나 흥남부두에서 군함을 타고 우리는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잡힌 포로들이 집결된 수용소가 있었다. 목욕은 물론 할 수 없었고 몸에는 이가 득실거리고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짐승의 꼴이었다. 담요 한 장, 식기 한 개, 숟가락 한 개를 들고 막사로 향했다. 한 막사 당 100여명 정도가 수용되어 모두 6천~7천 명이 그곳에 수감돼 있었다.

포로에게는 포로번호가 부여되었다. 잊혀지지 않는다. 104570번. 고문은 여전했다. 전선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대전까지 함락되기 직전에 있었다. 전선의 상황은 수용소 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다. 감시병들은 너희들 때문에 우리의 전우가 죽어간다며 구타를 해댔다.

포로들 사이에서 외국의 외딴 섬으로 우리를 이송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1951년 1월 중순 나는 소문 그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군함에 몸을 싣고 도착한 그 섬은 바로 지금의 거제도다.


정리=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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