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발(1874~1931)선생은 김해와 일제에 강점당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다 간 선각자적 인물이었다.
김해에 학교를 세우고, 김해의 경제를 위해 일했고, 독립운동 자금으로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그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나, 선생이 남긴 업적만은 김해에 오롯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인'으로도 불리는 허발 선생.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자.

▲ 허발 선생 초상화.

경상도 진사시 합격 후 신학문 관심
서울 측량학교  졸업 뒤 직접 농사
1918년 곡식 100석 매입해 반값 판매
홍수 때마다 이재민 돕기 팔걷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전달
합성초등 세우고 한글강좌 개최 등
교육·경제·사회 각 분야 큰 족적

허발은 1874년(고종 11년) 김해군 활천면 마마리 192(현 안동)에서 허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허관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로 집안을 일으켰고, 일가친척은 물론 이웃까지 돌보며 한 생애를 살았다. 허발은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며 이웃들의 가난을 떨쳐내려 애썼던 부친을 보며 자랐고, 그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허발은 1894년, 경상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한학에 뛰어났으나, 허발은 급변하는 시대의 신학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 측량학교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허발의 가슴 속에는 지식과 함께 민족과 나라를 위한 굳은 의지가 자리했다. 측량학교를 졸업한 뒤 허발은 고향인 김해로 내려와 직접 농사를 지었다. 소작인들을 너그러이 대하는 한편, 곡물상과 정미소를 운영하며 사업능력을 키워나갔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허발은 1918년 곡식 100석을 매입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값으로 판매했다. 구휼사업을 펼친 것이다. 이 일은 매일신보(1918년 10월 24일)에 기사로 실렸다.
 
1918년부터 진영에서 시작한 곡물상은 겉으로 보기엔 분명 '김해평야의 만석꾼'인 허발의 곡물상이었다. 그러나 이 곡물상을 통해 서울이며 인천 등지로 엄청난 쌀이 실려 나갔으되, 한 푼의 돈도 돌아오지 않았다. 허발의 손녀 허해옥(64·부산 승원유치원 원장) 씨는 그 일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할머니에게만은 독립운동가인 '김 씨'를 만나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친구들이 그 많은 쌀 판 돈을 다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면, 서울의 기생방에 갔다왔다면서 웃으셨답니다."
 
할머니는 1926년 임시정부 창설 이후에야 남편에게서 '김 씨'가 김구 선생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허발은 또한 백산 안희제(독립운동가. 1885~1943)선생이 설립한 '경남인쇄'의 대주주였다. 백산은 백산상회·백산무역·경남인쇄 등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는데, 허발 역시 백산과 함께 활동한 것이다.
 
김해의 유지였던 허발은 이처럼 남모르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놓는 한편, 김해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앞장서서 사람들을 구했다. 1920년 7월 29일 동아일보는 '낙동강 최하류 김해에 큰 홍수가 났다. 구조인명급 출연품 박석권 씨 백미 150승(되), 허발 씨 150승, 장석호 씨 150승'이라고 보도했다. 이후에도 낙동강에서는 수 차례 홍수가 일어났고, 이때마다 허발은 이재민을 돕는 데 앞장섰다.
 
▲ 김해합성초등학교 본관 앞에 세워진 '허발 박석권 선생 공적 기념비' 앞에서 이 학교 학생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허발은 오늘날의 김해합성초등학교를 세운 교육자이기도 했다. 김해합성초등학교 본관 입구 왼편에는 지난 1967년 '허발 박석권 선생 공적기념비'가 세워졌다. 비에 새겨진 글은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철학박사 안호상 선생이 지었다. 그 중 한 대목이다.
 
'수로임금의 빛나는 옛 도움터인 김해에 민족 운동의 횃불을 드신 허발님과 박석권님 두 선생이 나심은 김해사람과 또 배달민족 전체의 큰 자랑이며 명예다. 옛 말에 십년의 계책은 나무 심는 데 있고 백년의 계책은 사람 가르치는 데 있다 하였다. 민족 장래와 조국 백년의 영구한 밑천은 훌륭한 애국애족자 양성에 있다. 잔인한 일제의 포악한 탄압과 감시를 무릅쓰고 1922년 허 선생님은 논 이백 마지기 값어치인 이만원을 중국 상하이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비밀리 부치시는 한편 다시 오백석지기와 또 박 선생님은 논 삼백석지기를 던져서 육년제 합성학교와 이년제 고등과의 학교 벽돌 이층집을 지으시니 이것이 독립운동의 상징 전당이 된 것이다.'
 
김해합성초등학교 학생들은 누구나 이 공적비와 허발을 알고 있다. 허해옥 씨는 "당시에 일본은 학교에서 우리말을 못 가르치게 했는데, 합성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할아버님은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게 했다"고 말했다.
 
허발은 1929년 7월에 학교에서 '김해 한글 강좌'도 열었다. 한글 수업이 끝나면 가락국의 고대역사와 고적을 소개하는 시간도 따로 가졌다. 1928년 4월 15일에는 김해군민 대운동회가 합성학교에서 열렸다.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당시의 김해사람들은 마음껏 달리고 외치며 가슴 깊이 억눌린 분함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날의 '가야문화축제'의 시원은 이 대운동회가 아니었을까?
 
나라가 다시 일어서려면 국민이 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육에 힘쓰는 한편, 허발은 김해를 위한 사업에도 마음을 쏟았다. 많은 업적 중에서도 낙동강에 최초로 세워진 '낙동장교(구포다리)'의 가교지점을 김해와 가까운 구포에 유치한 일을 살펴보자. 1933년 준공된 낙동장교는 1km 이상의 장교 중 한국 최초로 건설된 다리(1.06km)인데, 구포와 강서구 대저동을 연결한다. 이 다리를 놓을 때 가교지점을 구포로 할지, 사상으로 할지 의견이 둘로 갈리었다. 1931년 동아일보는 '낙동교 위치 쟁탈전 개시, 사상 부근에 가설하도록 사상 주민 진정'이라는 기사를 보도할 정도였다. 허발은 낙동장교의 가교지점을 구포에 세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허해옥 씨는 "할아버지는 다리의 준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다리가 준공된 이후 김해 사람들은 합성학교 교정에서 할아버지의 영정을 모시고 보고회를 가졌다"고 전했다. 낙동장교는 지난 2008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허발은 1931년 6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동아일보는 '김해의 은인 허발 씨 영면, 지난 12일 56세로 합성학교장으로 거행', 조선일보는 '교육계 공로자 김해 허발 장의, 남조선 사학의 권위자 십이일 오전 일곱시에 별세'라고 보도했다. 당시의 언론은 허발이 뜻밖의 병으로 별세했다고 보도했으나, 훗날 부인의 증언에 의해 일본 경찰의 습격에 의해 살해됐음이 밝혀졌다.
 
장례식에는 김해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문상객이 모여들어 허발의 죽음을 애도했다. 허해옥 씨는 "마마리 본가인 상가에서 장유의 장지까지 가는 동안 5백m마다 상을 놓아 문상객을 접대했다. 5만여 명이 넘는 문상객이 몰려들었는데, 사람들마다 이런 장례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허발의 마음은 교육·경제·사회 각 분야는 물론 독립운동에까지 고루 미쳤는데, 궁극적으로 김해사람들을 식구처럼 아꼈던 '김해의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허발평전'과 못다한 그의 업적 이야기

만석꾼 전재산 나라와 김해에 바쳐
손자·손녀 "남기신 큰 뜻 물려받아"

지난 3월 30일 '교육으로 구국운동을 한 허발'이라는 제목의 평전이 부산의 세종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이 지면에서 일일이 밝히지 못한 허발의 업적이 책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평전 발간은 손자 허원일·손녀 허해옥·문학평론가 정영자 씨가 함께 이루어낸 일이다. 허원일 씨는 십년이 넘도록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허발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현재도 도서관에 매일 나가 자료 수집에 전념하고 있다. 몇 년 전 수필가로 등단한 손녀 허해옥 씨는 출판을 맡았다.
 
평전을 쓴 정영자(부산문인협회 회장)씨는 "허발 선생의 손녀인 허해옥 씨의 부탁으로 이 책을 쓰게 됐다"며 "숨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자, 사회사업가로서 참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집필의 소감을 털어놓았다. 정 씨는 책을 쓰기 위해 김해를 수차례 오가며 허발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집필을 넘어 본문 편집, 표지 디자인, 장정까지 정 씨가 직접 하나 하나 결정을 할 정도로 고심했다.
 
허해옥 씨는 부산에서 승원유치원을 운영하며 어린이들의 인성교육에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주변에서는 허해옥 씨를 두고 "교육을 통해 구국운동을 펼친 허발 선생의 유지가 허 씨에게로 이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허 씨는 "할아버님은 김해의 만석꾼이었지만, 전 재산을 나라와 김해를 위해 내놓았기에 유산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큰 것, 할아버님의 뜻을 물려받았다"라며 잔잔한 웃음을 보였다. 허 씨는 평전을 김해합성초등학교에 전했고, 허발이 온 마음을 기울인 이 학교에 매년 10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지난 2월 졸업식에서는 그 장학금이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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