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공연이 있는 자라면 어떤 이유로도 오늘 죽어선 안 된다. 쓰러지기만 하고 반드시 공연 시작하기 전까진 다시 살아나야 한다. 공연에서의 자기 자리를 지켜내야만 한다.' 음악감독 박칼린의 산문집 <그냥 :)>의 한 구절이다. 일에 관한한 엄격한 그녀의 자세를 보여주는 말이다. 누구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 살 때는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분야는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정도의 각오는 가지고 무언가를 시작한다. 문제는 그 결심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와 얼마나 오래 가느냐 하는 것이다.
 
박칼린의 산문집이 출간되기도 전에 예약판매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유명인사에 대한 관심이구나 생각했다가 TV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 이전에는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싶어서 책을 읽어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스타가 아니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와 자기 자리에 선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2010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로 만들고, 합창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의 마음을 하모니의 감동으로 적신 '남자의 자격'에 대해서 쓴 글은 8페이지 정도에 사진도 한 장 없이 책 말미에 붙어 있다. 조금은 섭섭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동네 아이들에게 '노랑머리,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고,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자랐으며, 음악감독이라는 낯선 직업을 가진, 어쩌면 소수자의 입장에 서 있었던 박칼린. 그러나 그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자유롭고 폭넓은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삶의 기본으로 세워 살아가고 있어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성악을 전공한 미국 여성이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보고 매혹되어버린 한국 남성이 이룬 가정에서 태어난 박칼린은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수학하고 서울대 대학원 국악작곡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28살에 <명성황후>의 음악감독으로 데뷔해 <사운드오브뮤직> <페임> <시카고> <아이다> <노틀담의 곱추> <미녀와 야수> 등의 뮤지컬 음악을 담당하며 음악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TV에서 그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았다면 이 책에서는 조금은 무서운 면을 보게 될 것이다. 박칼린이 속한 세상에서 그녀는 마녀로 불린다. 연습기간 동안 배우들에게 "스스로 선택해서 온 직장이니 똑바로 해내라. 아님 빨리 없어져 달라"고 말하고, 몸이 아픈 배우에게는 "몸 관리를 어떻게 했는데?"라며 컨디션 조절조차 못하는 나약한 배우라고 쪼아댄다. 그런 마녀를 꿈속에서까지 보았다는 배우들의 말에도 당연하다고 인정한다. 완벽한 무대를 생각하면서 찾아오는 관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은 물론 배우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이야기를 풀어쓴 대목은 이렇게 하니까 그런 무대가 만들어지는 거구나 감탄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 뒤의 철저함에 적잖이 놀라게 된다.
 
자기 분야에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일정 정도 자신이 가진 재능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얼마쯤은 속이 상해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나는 정말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이 부분이 정말 안돼요."라고 힘들어하는 배우에게 "백 번만 더 해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하는 사람. 모르는 글도 백 번을 읽으면 뜻을 안다는데 열 번만 해봐도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올 한해에 자신이 맡은 임무를 생각하는 시기에 마녀 한 사람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살지 않은 삶이라는 게 얼마나 심심한 건지 느끼게 해줄테니까.
 



박현주 객원기자
북칼럼니스트, 동의대 문헌정보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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