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인물열전'에서는 김해문인화맥의 큰 족적을 이룬 차산 배전(김해뉴스 2월 22일자 보도)과 아석 김종대(김해뉴스 4월 11일자 보도)를 소개한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아석의 맥을 이은 수암 안병목(修庵 安秉穆·1906~1985)을 다룬다. 수암은 구한말에 태어나, 우리나라가 격동의 시대를 겪는 세월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 세월 속에서 평생 시·서·화와 함께 살았던 수암은 예술가였으며, 수집가였고, 서화비평가였다. 수암은 세상에 나가 기량을 뽐내지 않았으나, 그 예술세계만으로도 인정받고 존경받고 있다.
김해문인화의 뚜렷한 맥을 세운 수암의 예술 인생을 살펴본다.

조부 예강 안언호에 글 배우고 금주 허채의 '주산서당'에서 공부
아석 김종대로부터 서화 익혀 수암 서화는 추사의 정신에 닿아

6·25 와중 쏟아지는 서화에 애착, 보물급 작품 아끼는 마음에 수집
그림마다 시 붙여 제화시만 22수
한학 기반 선비로서 면모도 출중
예술·수집·서화비평가의 삶

▲ 수암 안병목 근영. 사진제공=김해전통서화연구회

안병목은 1906년 김해 진례면 시례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후 시례리 상촌마을에서 터를 잡은 광주안씨 안경지 공의 후손이다. 자는 문숙(文淑), 호는 수암(修庵)이다.
 
수암은 어려서 조부인 예강 안언호(김해뉴스 4월 4일자 보도)에게서 글을 배웠다. 김해에서 밀양으로 이주한 금주 허채(錦洲 許埰. 1859∼1935·조선말기의 학자)가 1928년에 강석(강의나 강연 또는 설교를 하는 자리)을 시작한 '주산서당'에 나가 공부했다. 예강과 금주가 성재 허전(김해뉴스 3월 28일자 보도)의 문인이었으니, 수암의 학문은 성재에 맥이 닿아 있다.
 
수암은 아석 김종대에게서 서화를 배웠다. 아석은 외종조부인 차산의 서화를 이어받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운현궁에서 서화의 안목을 넓힌 인물이다. 따라서 수암의 서화세계는 조선말기 추사 김정희의 서화 정신에 닿아있으며, 19세기 후반 이래 김해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서화가의 맥을 이었다. 20세기 초에 태어났으나, 19세기 후반의 학문과 서화의 맥을 모두 이어받은 인물인 수암 안병목이 근래에 와서 재조명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백윤 중앙대 예술대학 교수는 논고 '수암선생의 사군자 그림'에서 수암의 서화정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수암선생은 지식인으로서 시서화를 일률(같은 것으로 보고, 한결 같이 다룸)로 보고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를 학자와 예술가의 기본 소양으로 즐겼던 거의 마지막 세대이다. 그의 서화에는 서화불분(書畵不分·추사 김정희는 '글씨는 그림처럼 쓰고 그림은 글씨처럼 그리라'고 설파하며 대상의 본질을 압축표현하는 화풍을 일구어냈다)에 입각한 전통적 미의식이 담겨있다."
 
수암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상 극도로 혼란했던 시기였다. 수암은 세태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지키는 삶을 살았다. 6·25와 관련한 수암의 일화는 그가 서화에 대해 얼마나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전국 각지의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급한대로 지니기 쉬운 가보를 챙겨들고 피란 온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자 돈을 구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보물들을 내놓았다. 선조들이 남긴 그림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수암은 돈을 구해 그 보물들을 사들였다. 금전적 가치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아꼈기 때문이다.
 
 

▲ 수암의 시서화가 담긴 작품.'묵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호생관 최북, 자하 신위, 소치 허유, 석파 이하응, 오원 장승업, 심전 안중석의 그림을 수암이 소장하게 된 연유이다. 오늘날 우리 전통서화의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그림들은, 난리 중에 사군자를 사랑한 수암을 만나 무사히 전해질 수 있었다. 수암이 서화 수집가로 서화비평가로 오늘날 주목받는 것은, 당시 지방의 서화애호가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서화를 소장한 까닭에 있다.
 
수암은 이 그림들을 얻은 기쁨을 '가장서화제영(家藏書畵題詠·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화에 붙인 글)'으로 남겼다. "귀한 서화 손으로 어루만지니 마는지 펴는지 모르겠고, 창윤한 필묵의 기운 나의 정신에 전해지네. 이들 서화에 세상 모든 재능 다하였음을 알겠으니, 누가 이 신묘한 예술에 새로운 경지를 더하겠는가."
 
수암은 각각의 그림마다 시를 붙여, 그림을 보는 마음을 표현했다. 수암은 100수 정도의 시를 남겼다. 그중 그림에 붙인 제화시가 22수에 이른다. 수암의 서화에 대한 사랑과 취향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김종원 경남서예가협회장은 "수암선생이 그림에 남긴 서화 제문시는 이 시대 그 누구도 남기지 못한 부분"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수암은 현재 심사정(1707~1769·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의 산수화에 이런 제화시를 붙였다. "집을 덮은 산 무너지려는 듯 하고, 좁은 길 나무는 하늘을 가린다. 다리 위 나귀 탄 나그네, 분명 땅 위의 신선이겠지." 수암은 심사정의 그림을 보면서 세상을 초탈하고 싶은 자신의 심경을 들여다 본 것이 아닐까. 수암이 수집하고 소장한 그림들은 수암의 예술세계 구축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수암의 난은 이하응을, 매화는 허유의 양식을 본받았다.
 
수암은 또한 글씨를 중요시했다. 젊은 시절에 글씨 쓰기에 힘쓰던 수암은 "글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글씨는 쓸 곳이 없다"는 조부의 훈계를 지키며, 그 말을 발전시켜 이렇게 말했다. "글은 도를 담는 그릇이요, 글씨는 글을 담는 그릇이라네. 그릇으로 담으려 한다면 그 그릇을 어찌 다스리지 않으리오." 선비가 글씨에도 힘써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수암은 한학에 기반을 둔 선비로서, 급변하는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한시에 담기도 했다. '이상극(이상한 나막신)'이라는 시를 우리말로 풀어 읽어보자. "세상 사람들 다투어 고무신을 좋아하나 / 나 홀로 세상 인정과 달리 옛 가죽신을 끄네. / 어찌 비 한 번 왔다고 갑자기 바꾸어 신으리, / 짐짓 남아 있던 나막신 꿰신고 마당으로 내려서네."
 
자고 일어나면 바뀌고 발전하는 근현대 한국사회의 변화는, 이 땅의 백성들을 정신없이 몰아쳤을 것이다. 그 속에서 수암은 전통 시서화를 지키는 것으로 세계를 지켰으며, 또한 자신을 지켰을 것으로 감히 짐작해볼 수 있다. 그것이 수암 만의 현실참여방식이 아니었을까.
 
 

▲ '매죽'

수암의 시 '한가로이 앉아 먹을 희롱하며'는 세상을 바라보는 한 예술가의 심경을 보여준다. "초려에서 붓 놀린 지 그 몇 년인가 / 붓과 벼루 참으로 숙세(전생)의 인연이라네. / 세상과 어긋나 발꿈치 거듭 잘려도 뉘 가엽게 여기랴만 / 필연(붓과 벼루) 속에서 노니는 것이 백붕(많은 돈)의 잔치보다 낫다네. / 벽 틈으로 빗긴 무지개 달도 못 보았거니 / 종이 위에 어느 때 연무를 맺을꼬. / 탄식하노니 하늘은 나에게 너무 박정해 / 남보다 나은 재예 하나도 주지 않다니."
 
하늘이 재주 하나 주지 않았다는 수암의 말은 겸손이라 하겠다. 김종원 경남서예가협회장은 "예술적 능력과 소양을 지닌 동시대 인물들이 기량을 뽐내며 시대의 조류에 편승했으나, 수암 선생은 시서화의 한결같은 세계관을 충실히 이행한 고아한 예술혼과 냉철한 열정을 보이고 있다"며 "선생은 시서화가 혼연 일체된 예술경계를 보여준다. 예술의 자세에서, 예술이 한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작용하여 가느냐 하는 점을 우리가 배울 수 있으면 족하다"고 말했다. 또한 "경남에서 이렇듯 분명한 예맥이 있음은 지역의 자랑이며, 현대 예술 활동에서도 눈여겨 봐 둬야 할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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