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비춘 이 한 권'이라는 제목을 듣고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 중에서도 마음 한켠에 깊이 자리 잡고 있어, 가끔 꺼내보는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가장 먼저 기억났다. "나이가 들면서 숨가쁘게 정상으로 끌고 가는 책보다는 도중에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거느리고 있어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는 책에 더 정이 갑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이 책이 그런 책이다.
 
박완서(1931~2011)는 마흔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裸木)>이 당선돼 등단했다. 그는 대표작 <엄마의 말뚝>을 비롯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다 불혹의 나이에 등단한 늦깎이 작가이기도 하다. 분단의 현실을 아파하고, 때론 허위적이고 물신주의적인 삶을 비판한 그의 작품들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여든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우리 삶의 여러 모습과 꾸준히 대화하며 글쓰기를 좀처럼 쉬지 않았던 그는, 진정한 의미의 '국민작가'였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고 있으면, 마치 나이 차 많이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듣고 있는 듯하다. 그의 책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이 책 역시 아름답게 보이려고 무언가 덮어쓰거나 치장하고 있는 글들과는 너무도 다르다. 솔직담백하고 유머러스함이 묻어 있다. 또한 한국어의 맛을 제대로 살린 책이라 더 마음에 든다. 그냥 글 그 자체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책이라 좋다. 그러면서도 일상의 경험에서 쌓인 지혜들이 마음에 와 닿아, 삶에 지친 나에게 읽는 재미를 준다.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을 소개해 본다.
 
"맨손으로 흙을 주무르다가 들어오면 손톱 밑이 까맣다. 외출 할 일이 있으면 정성들여 손을 씻지만 대강 씻고 무심히 외출한 적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고 사람을 만날 때면 열심히 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지만 속으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며칠만 나의 때 묻은 손톱을 간직하면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기발하면서도 엉뚱한 그 분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한참을 웃고 또 웃었다. 이외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맞아'를 되풀이하는 나를 매번 발견한다. 흙에 대한 경험, 남대문, 월드컵 같은 경험을 다른 시각으로 다시 떠오르게 만들어주는 글의 마력에 푹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조금은 비겁하다'라며 자신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송구스럽지만 나와 같다며 공감하기도 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세상은 좀 더 살만하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해 주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망과 꿈을 심어 준다. 아동문학가라는 또 다른 도전으로 보이지 않는 여행길을 떠나는 나는, 내가 가는 길의 커다란 이정표가 되어준 박완서 작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이난주 씨는
1971년 부산 출생. 사)김해색동어머니회 3대 회장 역임 현재 고문, 김해YWCA 이사 및 교육부위원장, 부산문인협회 회원. 동화구연가, 아동문학가, 독서지도사, 책놀이·동시낭송·김해도서관 및 김해시 통합 도서관·교과부 지혜나눔강사로 김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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