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김해로 쳐들어왔을 때, '사충신(송빈·김득기·이대형·류식 김해뉴스 5월 2일자 참조)'은 김해성이 함락될 때까지 싸우다 순절했다.
부사 서례원이 달아나고 왜적에 함락된 김해의 운명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였다.
수장이 사라진 김해 백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때 선산(현재 경북 구미 인근)에서 벼슬 없는 선비로 지내던 권탁(權卓·1544~1593)이 김해로 와, 김해성을 지키는 수성장이 되기를 자청했다.
권탁은 선조의 국문교서를 봉행하고, 왜의 땅으로 납치될 위험에 빠진 100여 명의 백성을 구출했다. 권탁은 당시 전투에서 심한 상처를 입고 세상을 떠났다.
임호산 아래 흥동에 권탁의 충정을 기리는 현충사와 '선조어서각'이 있다.

▲ 흥동에 위치한 현충사가 푸른 녹음에 싸여 있다. 선조어서각은 안쪽에 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임진왜란 때 벼슬 없는 선비 권탁
선조 의주 피란 소식 듣고 비분강개
경북 구미 인근서 홀로 걸어 남하


권탁은 안동 권씨의 후손으로, 경상도 선산부 월동리에서 아버지 권길원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원(思遠)이다. 얼굴과 거동이 뛰어나게 아름다웠고, 키가 컸으며, 힘 또한 셌다.
 
권탁은 김해 출신이 아니지만, '김해의 인물'로 꼽힌다. <김해읍지>는 권탁에 관한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동인(안동 권씨). 임란에 남중(남쪽 지방)의 백성들이, 적에게 포로로 잡혀 바다로 건너갈 즈음에, 탁이 선조대왕의 언문교서를 받들고, 성중에 잠입하여 100여 명 우리 백성을 달래어 데리고 나왔다. 이로써 공을 세워 벼슬에 음서될 수 있었는데, 여러 해 되도록 미루어 왔다가 임인년에 탁의 증손 재도가 상소를 올려 숙종조에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를 증직하였다."
 
임란 당시 선조가 의주까지 피란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흔 아홉의 권 탁은 "임금이 치욕을 당하니 신하는 죽어야 하는 날, 대장부가 어찌 몸을 산골짜기에 숨기며, 하물며 총검을 잡고 싸우는 일을 어찌 녹을 먹는 사람만 하겠는가"라며 칼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왜적이 쳐들어 오는 남쪽 지방에 가기를 두려워했다. 권탁은 홀로 걸어서 김해까지 왔다.
 
부사 달아난 김해에서 수성장 자임
선조 한글로 쓴 '선조국문교서' 가지고 포로가 된 백성들 구하려 비책 꾸며
왜적 40여명 모두 베고 구출 성공


부사가 진주로 달아나버린 김해는, 사충신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순절하고, 병졸들은 흩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이웃 고을의 수령이 김해 수령을 겸임하고 있었다. 겸임수령은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해서 부산 동래에 주둔한 왜적을 막을 방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때 권탁이 스스로 수성장이 되기를 청했고, 겸임수령은 크게 기뻐했다. 권탁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성 위에 올라가 군사들을 격려했다. 화살과 돌을 운반하며 밤낮을 쉬지 않고 경계한 덕에 왜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한편, 충무공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듭하면서 조선은 조금씩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와 연합하여 왜적을 향해 전면적인 반격을 시도했다. 이때 왜적이 점령한 지역에 있는 백성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1593년 9월, 선조는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려는 조정의 의지를 담아 왜적의 근거지에 방문을 붙였다. 방문은 이 땅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씌어졌다. 이것이 '선조국문교서'(宣祖國文敎書)다.
 
▲ 임진왜란 당시 한글로 씌어진 선조국문교서. 사진 제공=현충사
이 교서를 현대어로 풀어보자. "너희들이 처음에 왜적에게 끌려간 것은 너희의 본 마음이 아닐 것이다. 돌아오고자 해도 왜적에게 발각될까 무섭고, 또한 나라에서 너희들이 적을 따른 죄를 물어 목 벨까 두려워, 지금까지도 탈출하여 나오지 못했으리라. 지금부터 다시 의심하지 말고 서로 데리고 나오면, 죄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적을 잡아오는 자나, 왜적의 실정을 조사하여 오는 자나, 많은 동포를 데리고 오는 공로가 있는 자는 양인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마땅히 벼슬과 상을 내릴 것이다."
 
선조는 그러면서 "누가 이 유서(諭書. 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갖고, 왜적 속에 들어가 우리 백성들을 불러 올꼬?"라며 남쪽 지방의 장수들에게 따로 교시를 내렸다. 그러나 왜군의 기세가 드세 선조의 뜻을 받드는 장수가 없었다. 이에 권탁은 "임금의 말씀에 이처럼 깊은 고민과 측은함이 담겨 동물이라도 감격할 만한데, 어찌 신하로서 죽기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계산할 것인가!"하며 분연히 일어섰다.
 
권탁은 포로의 가족처럼 꾸미고, 밤중에 왜적의 진지로 잠입했다.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새벽까지 기다리니, 조선 백성 수 십 명이 땔감을 마련하러 나왔다. 권탁이 소리를 낮추어 "조선 사람이다"라고 외치자, 백성들은 매우 놀라워했다. 권탁은 "나는 김해성의 장수 권탁이다. 주상 전하께서 너희들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할까 가련히 여겨, 언문전교를 내려 나에게 하명하시어 불러들이라 하여 왔으니 빨리 따르라"며 함께 가기를 권했다. 백성들은 "우리들이 왜적의 종으로 일하기를 달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잡혀 있어 차마 버리고 갈 수 없다"며 울었다.
 
권탁이 선조의 교서를 꺼내 읽자, 백성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권탁이 급히 이를 제지하고 백성들에게 왜적을 유인할 계책을 알려주었다. '김해에 사는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 갈 친척들을 영결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가져와 만나기를 청하니, 함께 나가 배부르게 먹고 오자'는 말로 왜적을 속이라고 일러주었다.
 
자신은 큰 상처 입고 1593년 11월 사망
1722년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 추증


다음날 권탁은 낙동강 어귀에 큰 배를 대고, 장사 수십 명을 수풀더미에 숨겨둔 채 왜적과 백성을 기다렸다. 이경(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이 되자 포로들을 포승줄로 엮어 앞세운 왜적 40여 명이 칼을 찬 채 뒤따라왔다. 권탁은 왜적에게 술을 먹이며 시기를 보다 왜적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놀란 왜적들이 권탁을 공격했으나, 숨어있던 장사들이 뛰쳐나와 나머지 왜적들을 모두 베었다. 이 때 권탁은 몸의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다. 두꺼운 옷을 뚫고 피가 주룩주룩 흘러 내릴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으나, 권탁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100여 명의 백성을 배에 태워 함께 김해로 돌아왔다.
 
당시 낙동강 인근에서는 구포, 덕천, 물금, 마사, 가락 등지에 왜적이 성을 쌓고 주둔했다. 권탁이 백성들을 구출해 온 성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목숨을 던져 백성들을 구해 온 그 충정과 용맹만큼은 오롯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권탁은 이후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크게 덧나 관직을 받기도 전인 1593년 11월 21일 쉰 살의 나이로 김해성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1722년에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를 추증받았다.

도문화재자료 30호 '선조어서각'

선조국문교서 보관 위해
앞·옆 모두 1칸 맞배지붕
1836년 후손들이 건립


▲ 선조국문교서를 봉안했던 선조어서각.
'선조어서각'은 김해시 흥동 산 20의 3에 위치하며, 지난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호로 지정됐다. '선조국문교서'를 보관하기 위해 후손들이 1836년 처음 세웠다. 어서각은 앞면 옆면 모두 1칸 규모이며, 맞배지붕으로 꾸며졌다. 세월이 흘러 퇴락하자 1989년 현재의 자리(원래 있던 곳에서 동쪽 기슭)로 옮겨 현충사와 함께 증축하여 새롭게 단장했다.
 
선조국문교서는 권탁 장군 후손들이 중요 유품으로 보관해 오다가, 선조어서각이 건립되면서 어서각에 봉안했다. 교서는 1975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다시 1988년 보물 951호로 승격됐다.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75×48.8㎝ 크기이며 양질의 저지(楮紙·닥나무 종이)에 한글로 쓴 교서이다. 유서지보(諭書之寶·임금이 내리는 명령서에 찍는 어보)가 세 군데에 찍혀 있다. 이 교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또한 모든 공문서를 한문으로 기록하던 시절에 한글로 된 흔치 않은 국왕의 교서라는 점에서, 국문학 분야에서도 중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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