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벽돌과 담쟁이 넝쿨이 어우러져 고색창연한 진영성당.
진영읍의 마을들은 주산(主山)의 금병산(271m)을 사방에서 에워싸는 모양으로 생겨났다. 금병산 산자락에 생긴 마을 만해도 북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진영리(북), 여래리(동), 내룡리(동남), 하계리(남), 방동리(남서), 좌곤리(서) 등으로 진영의 13개 동리 중 6개 마을이 여기에 해당한다.

<김해지리지>는 옥황상제가 신선들을 모아 조회를 벌이는 모양(상제봉조형)의 금병산과 그 아래서 장군이 크게 진영을 펼친 것 같은 지형(장군대좌형)이라 진영리가 되었다 한다. 군대의 진영(陣營)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갈 진(進)에 길 영(永)의 보다 상서로운 뜻의 한자로 표기되었다는 것이다. 금병산의 쇠 금(金)은 비단 금(錦)으로도 쓰여 비단에다 병풍 병(屛)이니 금병산은 진영마을의 등을 둘러싼 '비단병풍'과 같은 산이다.

지난번 동쪽의 설창리에서 시작한 진영순례의 발걸음이 설창사거리를 지나 진영로에 들어선다. 금병산 너머 서쪽 좌곤리 쪽 김해대로 변에 늘어선 갈비집들 만큼은 아니지만, '진영갈비'의 유명세를 선점(?)이라도 하려는 듯 '가든'이나 '한우'라고 쓴 간판들이 먼저 눈길을 끈다. 진영로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신용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이 언저리가 신용리이고, 왼쪽으로 꺾어 안쪽으로 제법 깊숙이 들어가면 내룡리가 된다. 경남안전건설체험교육장을 지나 용담마을표지석이 있는 당산목 앞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진영로454번길을 따라 70여 호 정도의 용담마을을 지난다. 장애인공동생활가정의 자성원을 지나 진영한서재활요양병원(병원장 김상진) 앞에서 내룡교(2006.5)로 윗쪽 내룡저수지에서 발원하는 설창천을 건너면 태종산을 배경으로 아담하고 평화로운 들판을 앞에 둔 내룡마을이다.
 

▲ 명나라에서 조선에 귀화한 김평을 기리는 아민재.
빽빽한 신록에서 금방이라도 연록색 물이 떨어질 것 같은 마을입구의 당산목이 눈에 들어온다. 당산목 아래 정자에서 모내기 준비의 일손을 쉬던 어르신들이 '쓰잘 데 없는'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가리키며 "머 할라꼬?"하고 묻는다. "아, 예~"의 어설픈 대답과 미소로 고개만 꾸벅하고 새로 희게 칠해 네모나게 빛나는 마을회관에 오른다. 마을회관 옆엔 정비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재실이 있다. 명나라에서 한림원시강을 지내다 조선에 귀화했던 김평(金坪)을 기리는 아민재(牙悶齋)다. 산서성 태원(太原) 출신의 김평은 부친 김학승(金學曾)이 임진왜란 때 명군 장수로 참전했던 인연 때문이었던지 인조 4년(1626)부터 여기 들어와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이 60년 후에 알려지자 숙종은 1686년에 호조참판으로 추증하였으며 1872년 7월에 세워졌던 유허비는 이제 다시 새로운 돌로 세워진 모양이다.
 
산 너머의 죽곡리와 경계를 이루며 대종산(大鍾山)·태동산(泰洞山)으로도 불렸다는 태종산(太宗山·290m)에선 마을 원님에게 수청 들기를 거절하고 목을 매었던 처녀의 혼을 기리는 제사가 매년 칠월 칠석 날에 지내졌다 하고, <김해읍지>는 매년 6월 1일 태종산 산신제사 후 7월 10일까지 먹고 마시며 씨름승부를 겨루던 칠석놀이(七夕戱)를 기록했다. 여성이 산신으로 제사를 받던 고대적 풍습과 조선시대 여성의 정조관이 결합한 전승과 놀이로서 윗쪽은 상룡, 서쪽은 내룡, 동쪽은 외룡, 아래쪽은 용담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중국의 망명객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지세 좋고 살기 좋았던 마을인 모양이다.
 
▲ 1990년 건립된 진영도서관.
마을 동쪽 끝의 조은노인전문요양원(이사장 김상진)과 효능원(이사장 원광)을 지나 다시 진영로에 내려와 읍내를 향하다 혜성하이츠빌라와 정신건강진료전문의 진영한서병원(1994.5. 병원장 이국희)을 지나면 오르막길 오른쪽 하늘에 '진영단감시배지'란 표지판이 보인다. 원래는 초록색 꼭지의 감을 그렸던 모양인데 색은 바래고 윗부분은 뜯겨나갔다. 화살표대로 왼쪽 산비탈을 400m 오르자 이번엔 제대로 생긴 기와지붕 모양의 안내판이 1927년의 시배와 국내 최고(最古)의 단감나무를 알리고 있다. 김해가 자랑하는 전국적 명물의 '진영단감'은 진영역장(1923~1925)이었던 일본인 하세가와(長谷川)가 한국 여성과 결혼해 살면서 중구에서 첫 재배를 시작했고, 요시다(吉田)·사토(佐藤)·히가미(氷上) 등의 식물학자들이 여기 신용리에 100주 가량 시험 재배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중 60여 그루는 올해도 건강한 새 잎을 달았는데, 뒤틀어진 고목의 갈색과 감잎의 싱그러운 신록의 콘트라스트가 눈부시다. 1934년 단감영농조합이 결성되었고, 1937년에는 2만7천656주에서 181.4t의 단감이 수확되기에 이르렀다. 광복 후엔 더욱 확대 재배되어 1천683호의 재배농가가 1천936㏊에서 2만4천293t을 생산하여 4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진영단감의 홍보와 판로개척을 위해 1985년부터 열리고 있는 진영단감축제가 어느덧 27주년을 맞이한다.
 
다시 진영로로 내려 와 무려 111주년을 맞이하는 진영감리교회(담임목사 박종호)를 지나고, 석림그린·동림·대건 빌라와 기영타워(1992.2. 111세대)를 지나, 장복1차(1992.6. 194세대)·2차(1992.12. 377세대) 아파트 맞은편의 여래리 공정마을로 들어선다. 여래(余來)는 절터의 여래(如來)에서, 공주 공(公)에 머무를 정(亭)은 금병산 아래를 상제의 '공주가 머무는 골짜기'로 보는 풍수에서 비롯되었단다. '공주골'에는 진영제일고등학교, 한얼중학교, 진영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1930년 6월에 개교한 진영제일고등학교는 전통의 전문계 고등학교다. 2년제 진영공립농예실수학교로 시작해, 진영농고<1952.9. 농업·축산과>, 진영종고<1973.3. 농업(2)·보통(2)>, 진영농공고<1977.3. 농업(2)·기계(1)/1994.3. 조경(1)·섬유(1)·전자(2)>를 거쳐 1999년 3월부터 지금 교명이 되었다. 2005년 7월부터의 조경, 토탈뷰티, 섬유디자인, 컴퓨터응용통신, 인터넷비즈니스의 5개 학과에서 자유분방해 보이는 183명(남102)의 학생들이 34대 이승렬 교장 이하 33명의 교직원들과 전문기술 습득에 땀을 흘리고 있다. 체육관 앞을 지나는데 이제 막 창단되었다는 검도부원들의 기합소리가 우렁차다. 김해시의 두 번째 고교 검도부란다. 잎이 울창한 거목의 울타리와 잘 가꾸어진 잔디와 벤치정원이 아름다운 학교다.
 
▲ 주민들의 새로운 문화·여유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 진영문화센터.
1946년 8월 개교의 한얼중학교는 사립의 복음중학교로 출발했으나 1981년 3월에 공립으로 전환한 학교다. 12개 학급 374명의 학생들이 26대 이구지 교장 이하 31명의 교직원들과 공부하고 있다. 1986년 5월에 지금의 자리에 신축 이전했다 한다. 학교 뒷쪽 한 구석에는 1990년 11월 김해군이 세웠던 진영도서관이 있다. 접근성과 공공성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도서관이 왜 이렇게 후미진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3층 건물의 내부 배치는 '추억의 도서관'처럼 오히려 중장년층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바로 옆 휴먼시아아파트(2010.4. 962세대) 너머에 새로 들어선 진영문화센터 한빛도서관의 모던함도 좋겠지만, 조용하게 책을 읽고 혼자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이 분위기야말로 '올드 이즈 벗 굿 이즈'가 아닐까? 아파트 주민의 젊은층은 한빛도서관으로, 중장년층은 진영도서관으로 가는 것은 아닐는지.
 
▲ 청동기부터 조선까지 유적이 발굴된 팔각건물 터.
2007년 2월부터 11월까지 휴먼시아아파트 공사에 앞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시기의 문화유적이 발견되었다. 확인된 666기의 유구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가야시대의 제철과 도로 유적, 그리고 팔각건물의 존재를 보여주는 유물과 유구는 기억할 만하다. 제철 관련의 유물로는 철광석·송풍관·슬래그·철기류 등이 출토되었고, 발견 예가 적은 팔각건물터는 109동 뒤에 팔각정으로 복원하였고, 도로유구는 박석으로 그 옆에 위치와 범위를 표시해 두었다.
 
아파트를 나서면 여기가 진영인가 싶을 정도로 참 모던하고 시크한 진영문화센터가 있다. 여래리의 변전소를 들어내고 2009년 10월에 개관한 문화센터는 독서와 문화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진영인들의 지적 쉼터가 되었다. 책마을, 토론마을, 평생마을, 누리마을의 4개 공간으로 나뉜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에는 도서관, 강의실, 전시실, 공연장, 북카페 등이 들어섰고, 4개 공간을 연결하는 옥상공원과 1층 광장은 지적인 만남과 토론, 그리고 여유로운 휴식공간으로 충분하다.
 
온누리훼미리타운(1992.6. 108세대) 옆으로 경전선을 걷어내 철도도 없는 건널목을 건너면 진영시외버스정류장이다. 시내버스나 택시와 함께 시외버스가 서 있는 좁은 공간과 오래된 간판, 낡고 좁은 매표소와 대합실은 영락없는 1960~1970년대의 풍경이다. 철도가 떠나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진영역사가 그렇고 과거로 타임슬립 한 듯한 터미널과 그 앞의 진영로 풍경이 그렇듯이 진영마을의 재생 방안은 오히려 과거에서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군데군데 일본인의 적산가옥도 섞여 있어 오래되고 무질서한 읍내의 상가지만 노스텔지아 주머니를 쉴새 없이 자극하는 이 거리의 풍경은 이제 자산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제발 이제부터의 개발방향이 이런 생각과 다르지 않기를 기원하며 진영로를 건넌다.
 
▲ 대통령과 두 명의 영부인을 배출한 대창초등학교.
길 건너의 진영대창초등학교는 1명의 대통령과 영부인 2명(손명순, 권양숙)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3·1운동 다음 달인 1919년 4월 진영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해 1946년부터 지금의 교명으로 바뀌었다. 지난 2월 제88회 졸업식으로 모두 1만5천90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지금은 31개 학급 800명의 학생들과 3개 반 67명의 유치원생들이 31대 김진태 교장 이하 62명의 교직원들의 가르침으로 자라나고 있다. 특별한 것도 없는 교정과 교육과정인데도 클 대(大), 창성할 창(昌)의 이름이 좋아서인가, 상제가 앉은 금병산의 지세 때문인지 요즘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졸업생을 배출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인구감소로 힘겨워하는 면 단위 학교 치고는 재학생이 아주 많은 편이다.
 
학교 뒷문으로 나와 대영아파트(1990.9. 127세대)와 진영국민주택에서 진영산복로를 건너 하계로를 따라 올라가 대창마을회관, 원창 시인의마을아파트(2004.9. 198세대), 어린이집 '나무와 어린이'를 지나면 여래저수지가 있는 금병공원에 이른다. 진영단감의 상징조형물이 있는 중앙분수대를 중심으로 인라인스케이트장, 축구장, 어린이놀이공원, 테니스장이 있고, 여래저수지를 뒤 배경으로 한 원형의 이벤트광장과 잔디광장이 말끔하다. 호수에 떨어진 녹색 감나무 밭의 산 그림자 위에 작은 파문을 그리며 지나는 몇 마리의 청둥오리인지 원앙인지는 여유롭지만, 생활체육공간에선 여러 운동기구로 몸 만드는 사람들만 분주하다.
▲ 금병공원 여래저수지. 흐린 봄 하늘이 내려앉은 저수지와 자연의 푸른 기운이 한폭의 수채와도 같다.
조금 더 올라 꼭대기 부근에는 2002년 5월에 개관한 진우아동종합복지관이 있다. 실내의 각종 프로그램실과 야외의 놀이시설과 수영장, 그리고 자연학습장 등을 갖춘 시설로 악기연주·도자기·공예·미술 등의 문화예술활동, 건강상담·가족헬스 등의 체육활동, 과학실험·천체투영 등의 과학탐구활동을 통해 아동의 건강증진과 정서함양을 도모하는 복지시설이다.
 
복지관 뒤를 꼴딱 넘으면 하계리로 내려가게 되지만 읍내의 일정이 아직 남았기에 발길을 되돌려 진영산복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1935년에 설립된 진영성당(주임신부 이현우)에 들른다. 빨간 넝쿨장미가 한창인 울타리 너머로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성당(1979.10.)과 푸른 하늘에 솟구친 흰색 십자가를 따라 올라간 초록색 담쟁이가 아름다운 성당이다. 성당 아래에 보이는 '전통시장'의 표지판을 따라 내려간다. 메탈릭 실버로 신축한 진영상설시장도 있지만 가판대와 가마솥이 길거리까지 튀어나온 돼지국밥집, 참기름집, 열쇠집들이 훨씬 정겹다. 진영마을의 원조시장거리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며, 1901년 4월 창립으로 김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붉은 벽돌 진영교회(담임목사 박규남)의 은빛 첨탑을 올려다 본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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