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삼연못에서 바라본 주주봉 전경.
주촌 사람들에게 '주촌에는 무슨 산이 있습니까?'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꼽는 산이 '주주봉(酒主峯)'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주촌에서 제일 높은 산인 황새봉도 있지만,
그들은 주주봉을 주촌면의 '주봉(主峰)'으로 생각들 하고 있다.

김해시내에서 주촌으로 들어갈 때 제일 먼저 맞이하는 산이 주주봉인데다, 주주봉 아래의 마을이라 '주촌(酒村)'이라 했다는 '주촌의 유래'를 봐도 그렇다. 또 과거에 번성했던 선지포구의 주막거리를 '주촌지(酒村池)'라 불렀는데, 그 주촌지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산이기 때문에 주주봉(酒主峰)이라 불렀다고도 전해진다.
 최근 발굴된 '김해부 지도'에는 주촌을 물 맑고 인심이 좋아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의 '주촌(住村)'으로 표기한 바, 이를 근거로 '주지봉(住持峯)'으로 널리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주촌 사람들에게 있어 주주봉은, 마을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 상징적인 존재인 것이다.
 
주주봉(276m)은 높이가 같은 소황새봉과 함께 능선으로 이어진 산이다. 천곡리 쪽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여인의 봉긋 솟은 두 젖가슴처럼 생겼다. 오른쪽이 소황새봉이고 왼쪽이 주주봉이다. 군더더기 없이 빼어난 마루금이 봄을 타는 남정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로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이다. 원래 이 두 봉우리를 예전에는 학봉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 소황새봉과 주주봉 사이 능선에 있는 이정표.
이번 산행은 여인네 젖가슴 같은 주주봉을 봄바람 따라 걸어볼 요량이다. 천곡리 연지마을 불당골을 들머리로 해서 소황새봉~주주봉 능선, 정상, 주촌초등학교 인근 A&S 공장으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연지마을 입구에서 도안사로 오르는 길목. 불당골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그 길을 오른다. 봄을 만끽하는 햇빛과 바람, 빛의 색깔이 하루하루가 다른 날들이다. 어느새 집 담을 에워싸고 줄장미가 흐드러지고, 제라늄과 앵초가 불을 지르듯 선연한 꽃들을 피워댄다. 논에는 모판을 들여놓고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데, 논둑으로는 뱀딸기가 불빛 깜빡이듯 빨갛게 익은 '봄의 신호'를 한창 보내고 있다.
 
▲ 자란꽃.
대나무 숲의 바람은 한결 청량하여 길손의 땀을 씻어준다. 한낮 사람 없는 시골길을 무심히 거닐어 본다. 어수룩한 개소리 두엇 들리고, 한가롭게 풀을 뜯다 낯선 이의 출현에 경계하는 흑염소의 눈망울이 아롱아롱하다.
 
도안사에 이른다. 대웅전 앞 화단에는 홍작약, 백작약이 만발을 하고, 자색 꽃이 고혹적인 '자란'이 앞 다투어 꽃을 피워내고 있다. 도안사 오른쪽 길을 시작으로 산 속으로 든다. 계곡을 끼고 오르는데 가물어서 그런지 물길은 없다. 아무도 없는 산을 홀로이 걷다보니 적막강산을 떠돌아 드는 어느 탁발승 같은 기분이다.
 
얼마 오르지 않아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그렇게 우지짖던 새소리마저 끊겨 들리지 않는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오르는 고독한 산행 속, 이미 짙을대로 짙어버린 녹음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작은 계곡을 몇 번이나 가로지르다 보니 계곡의 물소리가 갓난아이 옹알이처럼 아주 작게 옹알댄다. 이 물소리가 갈증에 목을 축이듯 참 반갑기만 하다. 멀리 꿩의 울음소리가 온 산을 울리며 메아리친다.
 
꾸준히 오르막이 계속되더니 곧이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이정표가 보이는데 '소황새봉 능선'을 알리고 있다. 또 한 쪽 길은 소황새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인 것 같다. 소황새봉 능선방향으로 계속 오른다. 
 
▲ 골무꽃.
길은 이미 나무숲으로 터널을 이루고 있다. 산딸나무 꽃잎이 길에 흐드러졌다. 청미래덩굴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흔들고, 떡갈나무 잎들은 작은 바람 속에도 합죽선 부치듯 끄덕댄다. 여름을 알리는 '꿀풀' 하고초(夏枯草)가 벌써 보라색 꽃을 피웠고, 엉겅퀴는 꽃대가 무거운지 고개 숙이고 무리지어 서있다. 골무꽃도 수줍게 피어있고, 산초 어린나무도 길가로 문득문득 눈에 들어온다.
 
계속해서 숨이 턱에 차도록 오르고 또 오른다. 오로지 지난 계절의 낙엽들만 발길에 구령 맞추듯 바스락대며 길을 따르고 있다. 문득 시야가 서서히 열리더니 드디어 주주봉~소황새봉 능선에 닿는다.
 
능선에는 쉬어 가라고 벤치와 평상이 여유롭게 놓여있고, 시원한 바람이 함께 머물며 나그네의 뜨거운 몸을 식혀주고 있다. 땀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정표가 하나 서 있다. 그런데 주주봉 방향은 없고 '소황새봉', '주촌교' 방향만 명시해 놓았다.
 
주촌교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잠시 능선이 이어진다. 숨을 고를 정도로 경사는 소강상태다. 길은 솔가리에 쌓여 푹신푹신하다. 잠시 기분 좋게 길을 걸으며 소소한 즐거움을 새삼 느낀다.
 
서서히 오르막이 다시 시작되자 숨은 다시 가빠오기 시작한다. 땀은 계속 흐르는데 오를수록 바람 한 점 없다. 산길을 가로질러 쳐놓은 거미줄이 자꾸 얼굴을 덮친다. 갑자기 경사가 급해진다. 그 와중에도 발밑의 싸리나무 꽃, 고사리, 둥굴레 등속을 입에 올리며 인사를 한다. 이러구러 어기적거리며 오르다 보니 주주봉 정상(276m)이다.
 
비록 작은 높이의 산이지만, 주촌의 주산인데 정상 표시물 하나 없다. 그저 공터에 풀에 덮인 유택 하나 뎅그러니 앉아있다. 나무들 사이로 가까스로 경운산 줄기가 보이고, 내삼공단이 살짝 보일 뿐이다. 그래도 잘 생긴 활엽수들이 깊은 녹음으로 사람을 맞이하기에 그나마 불편했던 마음이 가신다.
 
정상에서 왼쪽으로 길을 내린다. 큰 키의 참나무와 소나무, 발치의 졸참나무와 개옻나무가 조화롭게 길을 내주고 있다. 경사는 쏟아질 듯한데, 마음은 느긋하기만 하다. 한참을 내려 가다보니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곧 다시 오르막. 잠시 후 주주봉과 이어진 작은 봉우리에 선다.
 
벤치가 두 개 놓여 있다.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며 물 한 모금 마신다. 하늘을 쳐다보니 연두색 참나무 이파리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거린다. 그 이파리들이 '간질간질' 사람 마음을 간질이자, 나그네는 마음이 가려워 어쩔 줄 몰라 한다.
 
▲ 산딸기꽃.
겨우 가려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길을 내린다. 내림 길이 급전직하, 경사가 엄청나다. 솔가리 때문에 미끄러워 더욱 조심스레 하산을 한다. 쏟아지듯 내려오니, 내리는 만큼 속세의 소리들이 점차 커진다. 발에 채인 솔방울들이 제 먼저 '또르르' 구르며 길안내를 자청한다.
 
잠시 편안한 능선이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날머리는 내어주지 않고 길을 틀고 또 틀며 능선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다시 두 갈래 길. 오른쪽으로 난  대나무 길을 택한다. 편안한 임도를 따라 사부작사부작 걸어 내린다. 왼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나 있는데, 죽순이 군데군데 솟아나고 있다. 우후죽순이라, 보름이면 다 큰 대나무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편안한 대나무 길을 편안한 걸음으로 조금 걷다보니, 멋진 집 한 채가 나타나고 곧이어 찻길이 보인다. 서부로 1541번 길. 주촌초등학교 바로 옆으로 날머리가 나 있다. 용접기 수리회사인 A&S 공장이 있는 곳이다.
 
도로 따라 주촌초등학교 쪽으로 간다. 집집마다 엄나무 잎들이 푸른빛을 더하고 무화과나무 뭉툭한 잎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곧 주촌초등학교에 도착한다. 인조잔디운동장의 싱그러운 녹색이 눈을 푸르게 시리게 한다. 
 
내삼연못에서 주촌초등학교 뒤 주주봉을 바라본다. 앞에서 볼 때와 달리 수더분한 인상을 가진 모습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저 육덕진 산과 더불어 한바탕 잘 놀았으면 된 것이지. 남가일몽이면 어떻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가 썩으면 또 어떤가? 녹음 속 나그네 하나, 하안거 풀린 불목하니처럼 온통 산을 불지른 후 내삼연못에 몸을 식히고 있음에랴.


Tip >> 내삼연못에 얽힌 설화
효명옹주 부부, 김해사람들 착취하던 연못?

주촌초등학교 길 앞에는 내삼지(內三池)라는 제법 넓은 연못이 시원스레 자리하고 있다. <김해읍지>에 의하면 이곳은 가락국 시대 때 왕실 쌀을 생산하던 '헌곡전'의 논물을 대던 곳이라 한다. 또 <김해지리지>에는 원래 조선조 인조반정의 주역 김자점의 집터였는데, 역적으로 처형되자 그 집터를 파내어 못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이는 김자점의 손자 세룡(인조임금의 부마)과 인조의 외딸인 효명옹주(김자점의 손부) 부부가 김해부 사람들을 착취하던 과정에서 생겨난 낭설이라고도 한다.
 

▲ 내삼연못 중앙에 있는 섬. 수려한 나무 한 그루가 인상적이다.
이들 부부의 농장이 김해부에 있었는데, 주인 없는 농토를 경작시켜 조세를 모두 빼앗아 가는 등,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능히 짐작이 간다. 어쨌든 그 부부의 농지에 물을 대던 연못이 바로 내삼연못이라고 말을 한다.
 
이런 설화와 기록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못에는 창포가 군락을 이루며 물색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물고기가 많은지 가끔씩 찰박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가물치 같은 대형 어종의 '철퍼덕'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연못 중앙에는 조그마한 섬이 있는데, 그 섬을 독차지한 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가득 이고 서 있다. 자태가 수려해 물에 비친 제 그림자도 참으로 점잖고 멋있다. 향토연구가들 중에는 '이 섬은 인공으로 조성한 것인데, 한국 전통 정원 양식을 따른 것으로 미루어 옛날 세력가들의 다목적 공간으로의 활용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금은 연못 주위로 목재 산책로를 만들어 주민들을 위한 수변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연못벤치에 앉아 섬의 아름드리 나무를 바라본다. 나무도 나그네를 바라본다. 그렇게 오래도록 봄빛에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최원준 시인/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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