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생몰연도를 보면, 그의 인생에 작용했을 굵직한 사건들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사람들의 삶은, 우리나라의 엄혹한 근현대사와 맞물려 있기 마련이다. 국가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했던 시기였다.
정진업(1916~1983) 시인의 삶 역시 그러했다. 정진업은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갖은 수탈과 억압을 받았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전쟁·혁명을 겪었고, 1980년대 초까지 살았다. 언론인이자 시인이었던 정진업은 개인의 감성을 넘어 민족문학의 의식을 담아 쓴 공론시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안타깝게도 젊은 사람들을 그를 알지 못한다. 정진업이 태어난 김해에서도 이름만 기억할 뿐, 그의 문학세계는 잊혀져 가고 있다. 경남·부산 문단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정진업 시인을 만나본다.

1916년 진영 여래리에서 출생, 김해보통학교·마산상업학교 졸업
극작가 이광래 문하에서 연극수업
1939년 소설 '카츄사에게'로 등단, 유치환 등 통영 문인들과 교유


▲ 정진업 시인의 청년시절 모습. 194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제공=경남대학교 박태일 교수
정진업은 1916년 4월 19일,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743에서 아버지 정세룡과 어머니 김정해 사이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월초(月礁)이다.
 
정진업은 김해보통학교(현 동광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김해에서 태어나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을 보낸 정진업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1년 가족과 함께 마산으로 이사했다. 마산상업학교(10회 졸업)를 다니는 동안 그는 문학·음악·연극·영화 등 문화예술 방면에 관심을 가졌다.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이광래(1908~1968. 연극이론가, 극작가 겸 연출가) 문하에서 배우로 활약하며 연극 수업을 했다.
 
문학에 남다른 자질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정진업은 소설로 먼저 등단했다. 1939년 5월, <문장>(일제 말기의 민족 수난기에 최후의 보루 역할을 했던 문학잡지. 1939년에 창간되어 1941년 4월에 폐간) 지에 단편소설 '카츄사에게'가 추천된 것이다. 한국문학 사상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소설가 상허 이태준(1904~? 1946년 월북 이후 사망시기 불명)이 정진업을 추천했다.
 
1940년에는 평양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잠시 다녔다. 통영 협성학원에서 연극을 가르치던 동안에는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 교육자)을 비롯한 통영의 문인들과 교유했다.
 
1948년부터 부산일보 문화부장
1950년 좌익 몰려 투옥생활
거제·부산·마산서 교사 재직


정진업은 광복 이후부터 지역 신문과 잡지 등에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7년에는 <경남교육>의 편집장을 거쳐 1948년부터 1950년 6월까지 부산일보 문화부장으로 일했다. 부산일보 문화부장 재직 시절 정진업은 언론 활동으로서, 또 활발한 창작과 비평으로 부산경남 지역문단을 이끌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같은 해 8월 좌익계 문화단체원으로 몰려 억울하게 6개월간 투옥생활을 한 뒤 부산일보에서 해임됐다.
 
이후 부산일보를 비롯한 지역 언론에 시를 발표하고 시집도 펴내며 창작활동을 했다. 거제 하청중학교와 하청고등학교, 부산 항도고등학교(1973년 현 부산 가야고등학교에 인수됨),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도 재직했다.
 
정진업의 시는 지역문학과 민족문학의 관점에서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시 '낙동강'과 '김해평야'를 보면 광복이 된 이후에도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묻어난다. 김해는 넓은 평야로 인해 일제에 의해 가혹하게 수탈을 당해 온 지역이었고, 정진업은 고향 김해를 휩쓸고 간 수탈의 역사를 지켜보았다. 김해 부산 마산에서 살았던 정진업에게는 낙동강 역시 소중한 시적 공간이었다.
 
시 '낙동강' '김해평야' 등
왕성한 창작활동 펼쳐
경남도 문화상·문학상 수상
문협 마산지부장 역임


1948년 2월 10일 부산일보에 실린 시 '낙동강' 전문이다.
 
"뻗쳐 있는 정열이/ 유구 칠백 리에 이르러도 / 강 두렁 마슬에는 /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 물과 사람과 / 그리고 사람과 사람끼리 // 조개 갈쿠리 / 칼날을 세워도 / 혓바닥에 녹아드는 / 낙동강 잉어회 / 통발을 메워도 메워도 / 강물보다 오히려 무서운 / 가난이 여기 있다 // 옥답이 모래밭이 아니라서 /강물이 고이는데 / 쌀이사 유명한 저 경상도 쌀 / 백옥인 양 쌓이는데 / 은혜 받아 본 적 없는 강물은 / 때로 누굴 위하여 /하늘 대신 /이리 노여워하였는가? // 강아! / 넘쳐 흘러 칠백 리 / 구비치는 탁류도 / 그예 바다로 가고야 마는 / 너의 정열이 나는 미쁘다"
 
낙동강 하류의 김해평야는 백옥같이 탐스러운 쌀을 생산하건만, 홍수로 넘치는 강물보다 더 무서운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변화가 없음을 한탄하는 듯하다.
 
정진업의 필봉은 언론인이었을 때는 더 날카로웠다. 부산일보 창간 3주년 기념시였던 '신문'에는 그의 결기가 시 구절마다 배어 있다.
 
"백양(白楊) 뿌럭지처럼 벋어가는 민주주의와 거기에 구근마냥 매달리는 오순도순 아름다이 살 겨레들을 위하여 올바르게 보도하는 것 (중략) 이렇게 천애에 이르도록 무수한 실재들이 육체 그대로 두드려지는 DALIY PRESS의 가차 없는 성능과 NEWS MAN의 중추와 말초가 윤전하는 여기는 신문사 (중략) 눈 눈 수많은 눈초리가 신문을 덮는다 // 동반구 한 귀퉁이에서 문화와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우리들은 펜과 기계와 땀으로 이렇게 싸워 왔다 // 백양 뿌럭지처럼 벋어가는 민주주의와 함께 불어가는 P NEWS AFFAIR의 연륜이여! // 그대 넓어지는 영토 속에 오래 영화하거라"
 
▲ 아내 정영애 여사와의 행복한 한때. 1960년대 어느날.
문학평론가인 박태일 경남대 교수는 정진업 시인의 시를 모아 엮은 <정진업 전집 1. 시>(세종출판사 펴냄·2006)에서 '언론시인' 정진업의 시 세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박 교수는 "정진업의 시는 시와 언론의 관계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여론이 지닐 바 공중성, 냉정한 시사적 관심과 발 빠른 증언, 사회 현실에 대한 정론 비평, 그리고 설득커뮤니케이션으로서 독자 지향적인 구술성이 그것이다"며 "이들을 두루 싸안은 집단성·사회성 짙은 담론이 정진업 시의 요체다. 개인에 치우치지도 않고, 탈역사적 상상의 지평으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구체적 현실주의와 공론 감각은 우리 근대시에서 쉬 찾을 수 있는 보기가 아니다"라고 평했다. 박 교수는 정진업 시를 '공론시'라 일컫는다.
 
정진업의 사회 공론적 감각은 세월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았다. 1979년에 쓴 서사시 '안중근'은 정진업의 형형한 정신세계가 그대로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단행본 책자 50여 쪽 분량에 이르는 이 긴 시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 도착해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일본의 정치가로서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진출에 앞장 서 조선에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를 저격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식 흐름과 행동을 따라 전개되는 시인데, 민족적·민주적 공분을 잃지 않은 정진업의 시 의식이 그대로 나타난다.
 
정진업은 자신의 시집 <불사의 변>에 쓴 후기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아무리 인간사회에 돌연변이가 생긴다 하더라도 한 시인의 문학정신에 있어 이미 확립되어진 개성이나 주관(그것은 사회, 인생, 세계의 관념이라 해도 좋다)에는 큰 변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직하게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타협을 모르는 나의 시도(詩道. 시를 짓는 방법)는 고독했고, 다난했고 또 그만치 빈궁했던 것이다."
 
정진업은 1963년 경상남도 문화상(연극), 1967년 경상남도 문학상(문학)을 수상했고, 문협 마산지부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활발한 문필활동을 했으며, 시집 <풍장> <김해평야> <정진업작품집 1> <불사의 변> <아무리 세월이 어려워도>, 산문집 <정진업작품집 2>, 번역서 <시와 아나키즘>을 남겼다. 1983년 3월 28일 인제대 부산백병원에서 지병으로 영면했으며, 마산 인곡공원묘원(9단지 146-15)에 묻혔다.
 
지역의 언론인이자 시인으로 살았던 정진업에 대해 박태일 교수는 "정진업은 경남·부산의 지역문학적 차원 뿐만 아니라 민족시의 흐름 위에서 무겁게 살펴보아야 할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 시집 <김해평야>는 1953년에 발행됐다. 표지그림은 하동 출신의 화가 김경이 그렸다.
<김해평야> 
                                        정진업
 
만장대에 올라 바라는
내 고장 김해들에
딸깃빛 노을은 타고 있었다
 
가람은
칠백 리를 감돌고
갈댓잎 함께 강바람에 나부대는
사래 긴 보리 이랑에
모래알로 영그는
수전 벼 포기
 
거기 흙두더지의 나고 죽는
먼 피의 요람은
오늘도
피 같은 노을에 젖어 있었다
 
아차 한번 일어서는
낙동 물굽이
 
김해 들 만경 호답이
황해로 이을지라도
되돌아오는 것도
멎는 것도 아닌
내닫기만 하는
허랑한 세월이여
 
딸깃빛 노을이 한창인
김해 들을 바라며
만장대 송뢰 속에
홀로 마음하는 것
 
흙두더지여
흙을 쪼아
옥토는 여기 만년
백골 묻어
꽃 피는
보금자리가 되라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그 흙이 내 시의 고향이다. 나는 <김해평야>에서 이렇게 노래했었다."
정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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