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영육교에서 내려다 보이는 옛 경전선의 흔적. 창원으로 달려가던 기관차와 자갈 아래로 숨은 기차선로가 눈에 잡힐 듯 아른거린다.
진영마을의 원조시장에서 진영로에 나서면 2009년 11월의 증축 개소로 말끔해진 진영지구대가 있다. 광복 후에 이북지서, 진영지서(1948.8), 한림지서(1987.1), 진영파출소(1991.8), 진영지구대 진례치안센터(2003.12)를 거쳐 2009년 11월에 진영지구대가 되었다. 2010년 2분기에는 전국 3위의 '베스트 파출소에 선정되기도 했는데, 여행자와 농공단지, 외국인 사건사고로 좀 더 바빠졌지만 진영 주민의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눈을 밝히고 있다.
 
▲ 옛 진영 역사.
옛 정취 물씬 풍기는 농약종묘·총포낚시·금은방의 간판을 지나면 2010년 12월 15일에 기찻길은 떠나고 건물만 혼자 남은 진영역사가 있다. 1960년대 분위기의 층층계단 아래로 붉은 벽돌색 지붕과 흰색 벽이 대조를 이루는 작은 시골 역사와 역전 광장은 쾌청한 아침인데도 꽤나 쓸쓸하다. 1905년 5월 13일 마산선(경전선)의 개통 때부터 모든 여객열차가 정차하던 김해 서부의 교통요지였고 많은 사람이 오가고 농수산물이 집산되던 진영과 김해 발전의 견인차였건만 이제는 활용 방안으로 머리를 아프게 하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107년 역사(歷史)의 역사(驛舍)를 그냥 묻기도 그렇고, 향수 자극에 좋은 소재임은 다 잘 아는데, 활용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생각하니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다. 역사와 선로공간을 활용한 시장박물관이나 기찻길미술관 정도가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작은 마을이나 대도시 재생을 선도했던 예도 많지만 결과에 대한 추궁에는 자신들이 없다.
 
▲ 진영농협에서 진영성결교회 사이에 있는 일본식 적산가옥.
과거 면사무소 건물의 진영농협에서 진영성결교회(1958.10, 담임목사 안경수)까지 여러 채의 일본식 적산가옥(敵産家屋)이 남아 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이만 포항 구룡포·전북 군산·목포 등지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의 아픈 기억을 장사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우리들 역시 매만지며 살아왔던 공간으로 수리와 복원을 통해 문화재로 지정하거나 지정절차를 밟고 있는 건축물도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에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의 저장 공간으로 보존할 수는 없는 걸까?
 
진영성결교회 이웃의 진영대흥초등학교도 일제강점기인 1921년 4월에 일본의 심상소학교로 시작한 학교다. 1946년 5월의 진영대흥국민학교를 거쳐 1996년 3월부터 지금 교명이 되었다. 2009년 2월에 대흥관(체육관)을 새로 세운 학교에서는 20개 학급 547명(남 304)의 학생과 2개 반 28명의 유치원생들이 24대 조기문 교장 이하 51명 교직원들의 따뜻한 지도로 자라나고 있는데, 지난해 6월엔 여자 체조부의 창단이 뉴스가 되기도 했다. 삼성타워(1992.12, 198세대)·대건빌라·빙그레아파트(1995.7, 114세대)를 거쳐 진영육교 아래를 지나면 진영라이온스클럽이 세운 '봉사의 탑(1983.11)' 옆에 부곡마을버스정류장이 있다. 길 건너 연합2차아파트(1992.8, 120세대) 뒤쪽 산자락에 모여 있는 30여 가구가 부곡마을이다. 고려시대 천민마을의 부곡(部曲)이 아니라 지아비 부(夫)에 계곡 곡(谷)을 쓴다. 기씨(奇氏)란 어부(漁夫)가 들어와 살면서 진영마을이 개척되었다고 전한다. 수로왕과 허왕후처럼 바다에서 오는 개국자의 이야기와 같은 형태의 전승이다.
 
▲ 층층계단 아래로 내려서면 추억으로 남은 옛 진영역사와 역전 광장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발길을 되돌려 진영육교(1977.7)에 오르면 발 아래로 동서를 가르던 경전선의 흔적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동쪽에서 진영 읍내를 지나 서쪽의 창원으로 달려가던 기관차 그려보기에 십상이다. 버릇처럼 철도를 들어낸 이 인공의 공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 이내 머리를 털고 공설운동장 교차로 쪽으로 내려간다. 김해대로에 나섰다가 곧바로 김해대로334번길로 들어선다. 진영세영병원에서 다시 태어난 진영삼성병원(2011.9, 병원장 박찬원, 150병상)을 지나 여래로20번길을 따라 가면 오른 편에 진영고, 진영여중, 진영우체국, 진영읍사무소, 왼편에 진영중앙교회(1993.1, 담임목사 최기동), 대한아파트(1995.6, 100세대), 그리고 음식점과 상가가 줄지어 있다. 진영이 과거 김해군의 수읍이었던 흔적들이다.
 
진영고등학교는 1966년 4월 사립 한얼여자고등학교로 개교해 1975년 8월에 진영여자상업고등학교가 되었다가 1981년 3월에 공립으로 전환하여 1999년 3월부터 일반계 고등학교가 되었다. 19학급 515(남 272)명의 학생들이 이기원 교장 이하 52명의 교직원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는데 두 녀석이 담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쳐들고 있다. 벌을 서는 모양인데 절로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그 앞을 지난다. 진영여자중학교도 1966년 3월에 사립 한얼여자중학교로 개교해 1975년 8월에 진영여자중학교가 되었고, 진영고와 같이 1981년 3월에 공립으로 전환했으며 1987년 5월에 현 교사로 이전했다. 12개 학급 394명의 학생들이 김은희 교장 이하 25명의 교직원들과 소녀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잔디운동장의 녹색과 붉은 타탄트랙, 벽돌색 교사와 흰색 윤곽선이 예쁜 교정 한 쪽에는 교육재단 한얼의 설립자였던 강성갑 목사의 흉상이 있다. 합창으로 풍부한 정서와 공동체 의식의 함양을 도모하는 여자중학교다. 진영우체국 옆의 진영읍사무소에서는 허동규 읍장 이하 24명의 직원들이 1만 5천744 세대 4만 1천203명의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사무소 한 쪽의 진영문화의 집에서는 초중고생과 일반을 위한 각종의 강좌가 연중 운영되고 있다.
 
▲ 진영2지구 유적 발굴현장. 가야 배모양 토기의 출토로 화제가 됐다.
읍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여래로에 나서 북으로 본산로를 따라 김해대로를 건너 본산리로 향한다. 왼쪽의 신도시 진영지구개발의 후속작인 진영2지구개발이 한창이다. 20만 4천평, 7천109세대, 1만 9천명 규모의 신도시가 추진된다는데, 오른쪽엔 산 경사면 전체를 벌겋게 벗겨놓은 발굴조사 현장이 보인다. 지난 4월 19일에 가야 배모양(주형)토기의 출토로 화제가 됐던 그 현장이다. 수집품으론 호암미술관과 호림박물관에 한두 점 있긴 하지만, 연대와 출전이 확실한 발굴조사에서의 출토는 처음이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지난해 8월부터 수고하고 있는 조사에서는 가야의 목곽묘 37기와 석곽묘 76기를 비롯한 205여 기의 유구에서 1천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시내 대성동고분군이나 주촌 양동고분군과 같은 계통이면서도 토기제작이나 무덤 축조 방법에서 또 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다. 특히 5세기 대로 생각되는 24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배모양 토기(길이 22.4㎝, 너비 10.3㎝, 높이 4.7㎝)는 평평한 바닥으로 임진왜란 때 연안에서 뛰어난 순발력과 기동력으로 왜의 수군을 궤멸시켰던 이순신 장군의 그 배다. 더구나 이 배는 '하지키(土師器)'라는 왜 계통의 토기를 싣고 있는 모습으로 출토되었다. 해상왕국 가야의 실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유물 하나가 확보된 셈이다.
 
▲ 창원시 대산면과 경계를 이루는 우암교(위)와 주호교 아래 바위를 파내 만든 인공수로.
본산준공업단지 서쪽 끝의 공장 몇을 지나면 주호마을이다. 본산교회(담임목사 강만부) 뒤쪽의 100여 호 정도가 따를 주(注)에 호수 호(湖)를 쓰는 주호마을로 주천강(注川江) 가에 있다. 호수는 주남저수지와 동판저수지이고 강은 낙동강이니 서쪽의 저수지가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주천강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창원시 대산면과 경계가 되는 우암교가 있다. 우암교 옆에는 폐기된 주호교(1942)가 있는데, 진영 쪽 주호교 아래에 예사롭지 않은 수로가 있다. 바위를 파내 입구 천정을 홍교처럼 만든 동굴 모양의 인공수로다. 어제 오늘에 만들어진 것 같지도 않다. <김해지리지>가 이 일대에 있었다고 전하는 무라이(村井)농장과의 관련을 추정해볼 뿐이다.
 
주천강을 따라 지난해 12월 준공 이후 낙동강에 맑은 물을 흘려보내는 진영맑은물순환센터까지 갔다가 본산로219번길을 따라 용성(龍城)마을을 지나 본산로로 돌아온다. 마을을 둘러싼 산세가 엎드린 반룡이나 산성 같다는데 군데군데 깎여 나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디가 용인지 산성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100년 전 쯤에 지어진 이름이라는데, 남쪽 마을 입구 본산로에 면해 있는 용화사(주지스님 월상)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1945년 3월 길 건너에 청해스님이 창사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친도 다녔다는데, 2003년에 중창한 대웅전의 단청과 열을 이룬 석상의 동자승들은 좋은데 법당 앞엔 왜 일본 절처럼 잔디를 심었는지 알 수가 없다. <김해지리지>는 근처에 노씨열녀문을 전하고 있지만 찾지 못하였다. 용화사 맞은편 3층 건물에는 본산리회관이 있다.
 
찐빵가게, 폐차장, 주유소, 공장들이 어지러운 본산공단을 뚫고 봉하마을로 간다. 봉화산(140.4m) 아래라 본산이라 했고, 봉화 아래라 봉하(烽下)라 했다. 봉화산은 시내의 분산성 봉수를 받아 밀양의 남산봉수에 전하는 봉화(수)대가 있어 그렇게 불렀다. 부산 동래에서 서울 남산에 전해지던 제2거(炬)의 일익을 담당하던 봉수였다. 조선시대에는 자암산봉수라 불렀는데, 자암산은 자암(子庵)이란 절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자암은 아들 자(子)니 아들의 절이란 뜻이다. 그러면 누가 부모인가? 부는 수로왕, 모는 허왕후로 각각을 기념하는 부은암(삼랑진 안대리), 모은암(생림면 생철리)과 함께 지어졌다고 전한다. <김해읍지>는 고종 3년(1866) 당시 층층바위가 무너져 기울어진 불당을 전하고 있다.
 
▲ 부평사거리 오른쪽 서어지공원과 아파트단지. 늪지가 논이 되었고, 다시 거대 신도시로 변했다.
무너진 층층바위 사이에 부처님 한 분이 누워 계시니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0호의 봉화산마애불이다. 누워있다고 와불이라고도 하지만 가부좌를 튼 좌상이다. 바위가 무너져 위에서 떨어졌을 것인데도 깨진 데가 거의 없다. 몇 년 전인가 보살한 분이 바로 세운다고 쇠사슬을 걸다가 오른 쪽 무릎이 조금 깨졌을 뿐이다. 당나라에서 밤마다 꿈에 나타나 황후를 괴롭히던 청년을 법력으로 바위틈에 가둬 신라 자암산(紫岩山)의 석불이 되게 했다고 하는데 이 마애불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허왕후의 아들을 기념하는 절에 있던 석불이라 생겨난 전설인 모양이다. 아들이 어머니 속을 썩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행사 후 며칠이 지난 평일 오전인데도 묘소를 참배하고 마애불을 지나 부엉이바위에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려시대 마애불의 존재는 잘 몰라도 노 전 대통령이 뛰어 내렸다는 부엉이 바위는 반드시 찾는 모양이다. 앞서 가는 등산복 무리를 따라 오르니 그렇게 시끄럽던 경상도 아지매들이 갑자기 숙연해졌다. 두어 번의 자살소동으로 새로 쳐진 나무펜스 위에는 누군가가 꽂아 놓은 노란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봉화산청소년수련원을 지나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대현마을로 내려와 본산입구삼거리에서 김해대로에 나선다.
 
서쪽으로 부평사거리에 이르니 오른쪽에 논바닥이 천지개벽해 2만 명이 사는 메트로시티의 진영신도시가 솟구쳐 올라 있다. 늪지가 논이 되어 부자 뜰의 부평(富坪)이 되었고, 논은 다시 거대 신도시로 변했다. 김해대로 쪽 서어지공원을 중심으로 양편의 상가지구엔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뒤엔 동쪽에서부터 진영중과 금병초등학교, 중흥S클레스(2006.2, 2010세대)·진영코아루(2007.10, 953세대)·진영자이(2007.12, 977세대)의 매머드 아파트단지가 자리잡았다. 저 많은 콘크리트상자마다 다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걸까?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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