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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야 우지마라 ~" 구슬픈 멜로디에 빼앗긴 조국도 기구한 삶의 민초들도 함께 울었다<상> 김해가 낳은 최고의 명가수 김영춘(1918~2006)
  • 수정 2017.04.26 11:30
  • 게재 2012.06.05 12:29
  • 호수 77
  • 10면
  • 박현주 기자(phj@gimhaenews.co.kr)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어도,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말이 있다. 노랫말은, 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1939년에 처음 나온 '홍도야 우지마라'가 바로 그런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김해 사람 김영춘이다. 김영춘의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와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얽힌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고, 이어 김해에서 살고 있는 유족들을 통해 김영춘의 삶과 고인의 김해에 대한 사랑을 다룬다.

 

 

 

 

   
▲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부주제곡이었던 '홍도야 우지마라'는 주제곡을 훨씬 뛰어넘어 대히트를 쳤고, 가수 김영춘은 당대 최고의 명가수로 떠올랐다.

김영춘(金英椿·본명 김종재·金宗才·1918~2006)은 1918년 6월 29일 김해 어방동 471에서 부친 김치관 씨와 모친 박소분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해보통학교(현 동광초등학교)와 김해농고를 졸업했다. 김영춘은 청소년기까지 김해에서 살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타향에서 늘 고향 김해를 그리워했다.
 
김영춘은 한국 대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를 부른 가수다. 일제강점기였던 1929년 전기식 축음기가 조선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1926년 가수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대히트를 치면서 사회적으로 레코드와 유행가에 대한 관심이 촉발됐던 터라, 사람들은 다투어 축음기를 들여놓고 레코드를 듣기 시작했다. 대형 음반회사들이 등장했고, 바야흐로 대중가요시대가 열렸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레코드 회사는 '빅타'와 '콜롬비아'. 콜롬비아 레코드는 '조선 팔도에 숨은 천재'를 찾는다며 전국 10곳에서 예선을 치르는 콩쿠르대회를 개최했다.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라는 책을 낸 이동순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의 말이다.
 

 

 

 

 

   
▲ 젊은 시절 김영춘.
"김영춘은 스무 살이었던 1938년에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가요콩쿠르에 출전해 입상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김영춘의 첫 데뷔곡은 그해 11월에 발표된 '항구의 처녀설'(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이다. 그는 30여 곡의 노래를 불렀지만, 1939년에 발표된 '홍도야 우지마라' 한 곡의 인기가 워낙 하늘을 찌를 듯했기 때문에, 다른 노래들은 상대적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노래 덕에 김영춘은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대표가수 자리에 올랐다."
 
1936년 봄, 서울의 '동양극장(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문극장. 1935년 설립. 객석 600여 석)'에서 극단 청춘좌가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공연했다. 임선규(1910년 출생 추정, 1970년 사망 추정. 연극인·극작가)가 1936년에 쓴 4막5장의 희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기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화류비련(花柳悲戀·기생의 슬픈 사랑을 다루는 작품류)의 멜로 드라마였고, 동양극장의 주된 레퍼터리였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오빠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홍도는 스스로 기생이 된다, 오빠는 홍도의 도움을 받아 순사가 된다, 홍도는 기방 일을 그만두고 오빠의 친구와 결혼을 한다, 시어머니는 기생 출신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고 마침내 쫓아낸다, 홍도를 오해한 남편마저 부잣집 딸과 재혼을 하고 홍도는 절망한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홍도는 남편의 새 여인을 살해한다, 그제서야 홍도의 결백이 밝혀지고 남편도 오해를 풀지만 홍도는 순사인 오빠에 의해 손목에 수갑을 찬 채 경찰서로 끌려간다….
 
당시 조선인 관객들은 이 연극을 통해 일제에 핍박받는 현실세계를 반추했고, 홍도의 삶에 자신의 삶을 대입시켰다.
 
이 연극은 조선 연극 사상 최장 공연 기록을 세웠다. 기생이 주인공이다 보니 기생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권번 기생 500여 명이 일시에 연극 구경에 나선 날에는 서울의 요정이 텅텅 비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주인공 홍도 역을 맡았던 여배우 차홍녀(1919∼1940)의 인기를 말하는 건 새삼스럽다.
 
이 연극은 1939년에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명우 감독(1901년∼6·25때 납북 이후 생사 미확인. 촬영기사·영화감독. 193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의 감독·촬영·편집)이 메가폰을 잡고, 차홍녀가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사람들은 다시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영화의 부 주제곡이었는데, 영화가 히트를 치면서 당연히 주가가 높아졌다. 1939년 4월에 음반이 발매됐는데, 수만 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동양극장 전속 극작가였던 이서구(1899∼1982. 극작가 겸 연출가)가 노랫말을 쓰고, 김준영(1907~1961. 대중음악 작곡가)이 작곡했다. 영화가 연일 대만원 사례를 이루면서 '홍도야 우지마라'는 대히트곡이 됐고, 김영춘은 당대 최고의 명가수로 올라섰다.
 

 

 

 

   
▲ 1939년에 발표된 '홍도야 우지마라'는 지금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지만, 정작 가수 김영춘의 이름은 잊혀져가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극장 안은 손수건을 미리 준비해 온 여성관객들로 미어터졌다. 오빠가 지쳐 쓰러진 홍도를 위로하는 장면에서 김영춘의 '홍도야 우지마라'가 흘러나왔는데, 그러면 객석은 눈물바다가 됐다. 이 영화를 본 한 기생이 처지를 비관해 한강에 투신한 일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이 노래는 더욱 유명해졌다.
 
인터넷에서 '홍도야 우지마라'를 부른 가수를 검색해 보면, 김영춘 외에도 박재홍·남일해·박일남 등 많은 후배가수들의 이름이 뜬다. 영화 역시 1965년에 전택이(1912∼1998)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이 영화에서는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였던 신영균, 김지미가 주연을 맡았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여성들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심금도 함께 울렸다. 고단했던 시절에 이 땅에서 부모와 형제를 위해 희생의 삶을 살아야 했던 누이들이 어디 한 둘이었는가. 그러니 이 땅의 많은 남성들도 '홍도'라는 누이 앞에서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서 살고 있는 김영춘의 아들 김무술(55) 씨는 "노래는 너무 유명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부르고 있지만, 정작 가수의 이름은 잊혀져가고 있다. 아버지가 김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많다"면서 "아버지는 고향 김해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늘 고향 이야기를 하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김해를 수차례 다녀왔다. 고모님과 사촌 형들이 김해에 살고 있다"고 전했다.

■ '홍도야 우지마라' 발표 당시 원본 가사
발표 당시의 표기법으로 소개한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직히랴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안해의 나갈 길을 너는 직헤라
구름에 싸힌 달을 너는 보왔지 세상은 구름이오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 주는 바람이 분다
홍도야 우지 마라 굿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놉게 가즈면
즐겁게 우슬 날이 찾어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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