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를 들으면 오빠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서…." 가수 김영춘의 여동생 김복득(88·부원동) 씨는 말끝을 잊지 못했다. 아직도 먼저 간 오빠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김 씨는 어방동 본가에서 태어나 부원동에서 한 평생을 살았고, 지금도 부원동에서 살고 있다. "부모님이 일곱 남매를 낳았는데 위로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오빠와 언니 그리고 나, 삼남매가 자랐습니다. 제가 막내이지요." 김영춘은 막내 여동생을 특히 아꼈다고 한다.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노래 한 곡으로 이 땅의 수많은 누이들을 위로했던 김영춘의 여동생 이름은 홍도가 아니라 복득이었군요"라고 하자, 김 씨는 그제서야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만 들어도 오빠 생각이 나고 눈물이 흐른다는 가수 김영춘의 여동생 김복득 씨. 김병찬 기자 kbc@

김영춘의 여동생 김복득 씨는 연극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도, 영화도 본 적이 없다. 그 연극과 영화를 보러 가기에는, 당시의 김해에서 경성은 너무 멀었다. 여성의 처지에 그 먼 길을 나서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노래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복득 씨는 김영춘이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회고했다.
 
"오빠가 어려서부터 노래는 잘 했대요. 그랬으니 가수도 되었겠지요. 하지만 나서서 까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말 수도 적고 점잖은 분이었지요. 성격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마음이 너무 좋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다른 사람이 안 가지고 있으면 바로 내주었습니다. 입던 옷도 벗어주고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돈도 잘 벌어서 어려운 친구들 일에 발 벗고 나서서 좋은 일을 많이 했지요." 복득 씨의 마음 속에는, 점잖은 성격에 너그럽고 따듯했던 오빠 김영춘이 아직도 가득했다.
 
청년 시절의 김영춘은 부산과 일본을 오가며 일을 했고, 그러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래서 복득 씨의 기억에서 오빠는 늘 바빴던 사람으로 남아 있다. 가수로 데뷔한 후에는 경성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멀리서 소식만 들을 뿐이었다. 극장이 미어터지고, 레코드판이 불티난 듯 팔리는 그 화려한 인기 속의 오빠를 곁에서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김해에서도 유명세는 느낄 수 있었다.
 
서예가 허한주(81)씨는 "당시 김해 인구가 12만여 명이었습니다. '홍도야 우지마라'를 모르는 사람도, 못 부르는 사람도, 김영춘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지요. 지금 김해에서는 김영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전히 제 18번은 '홍도야 우지마라'입니다"라고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복득 씨가 길을 나서면 김해사람들은 '저기, 가수 김영춘 여동생이 온다'면서 인기가수의 여동생을 둘러싸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오빠가 너무 자랑스러워 가슴이 벅찼지요." 지금도 나이든 김해 어르신들 중에는 "가수 김영춘 동생이 아니냐"며 알아보는 이가 더러 있다. "그럴 때면 오빠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있구나 하는 마음에 기분이 좋지요." 복득 씨의 마음 속에서 오빠 김영춘은 여전히 최고의 자랑이었다.
 
김영춘은 첫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지 못했는데, 후사를 이을 걱정을 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박옥순 씨와 재혼했다. 박옥순 씨는 연극배우 출신으로,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에서 주인공 홍도 역을 맡은 차홍녀 씨의 이종사촌 언니이다.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살고 있는 김영춘의 아들 김무술 씨는 "아버지가 고향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고 회고했다. "저도 5살 무렵까지는 김해에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김해에 대한 애착이 많았습니다. 소년기를 보냈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많이 얘기하셨지요."
 
무술 씨는 언제나 젊은 청년 같았던 아버지 김영춘을 기억했다. "아버지는 젊게 사셨습니다. 신문도 늘 보시고 책도 읽으시고, 세상 일에도 밝으셨어요. 후배들이나 젊은 사람들하고 대화를 나눌 때도 마치 청년처럼 깨어있는 의식으로 소통하셨습니다. 노인이 아니셨습니다."
 
연예인 본인은 인기에 싸여 있지만 그 가족은 어느 정도 힘이 들게 마련이라면서도 무술 씨는 "아버지는 늘 멋진 양복을 입고 계셨지요. 저보다 옷이 많았던 것 같은데, 모습도 생각도 젊고 멋진 아버지가 보기 좋았습니다"라며 웃었다.
 
김영춘은 데뷔곡 '항구의 처녀설'과 대히트곡 '홍도야 우지마라'를 비롯하여 '국경특급' '당신 속을 내 몰랏소' '북국천리' '동트는 대지' '나그네 황혼' '청춘마차' '장장추야' '희미한 달빛' '향수천리' '타향에 운다' '버들닢 신세' '인정사정' '남국의 달밤' '비연의 청춘항' '유랑써커쓰' '항구의 항등' '포구의 여자' '잘 있거라 인풍루' '청노새 극장' '타향사리 목선' '사막의 환호' '바다의 풍운아' '사륜마차' '항구야 잘 있거라' '동아의 여명' '아류산 천리' '목란의 자랑' '의주에 님을 두고' '성황당 고개' '항구의 전야' 등 30여 곡을 불렀다.
 
김영춘은 6·25 전쟁 당시에는 국군 위문 공연을 다닌 한 예술지원대의 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김영춘은 후배 연예인들을 데리고 전선을 다니며 위문공연을 한 공적을 인정받아 참전용사로 등록되어 있다. 80세라는 노령에도 후배들과 함께 지방공연도 다녔다.
 
김영춘은 명절이면 선산이 있는 김해를 찾아왔고, 노년에는 일 년에 수차례씩 김해를 찾아왔다. 그 때마다 만사를 제쳐놓고 김영춘을 모신 사람이 장영수(64) 씨다. 장 씨는 김영춘의 조카이다. "외삼촌은 한 눈에 보기에도 잘 생긴 분이었습니다. 할 말만 하시고, 신중한 품성이셨습니다. 담배는 즐겨 피우시는 편이었지만, 술은 입에도 안 대셨어요. 후에 담배도 건강 때문에 딱 끊으셨죠."
 
장 씨는 김영춘이 김해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했는지를, 직접 모시고 다니면서 지켜보았다. "외삼촌이 살던 부원동 일대가 너무 변해버린 것을 보면서, 옛 모습을 그리워 하셨어요. 김해에 계신 친구 분들도 만나시고, 고향 김해의 곳곳을 눈여겨 보시곤 했습니다."
 
▲ 데뷔 60주년 기념공연 후 김해시로부터 받은 공로패.
김영춘은 가수 데뷔 60주년 기념공연도 김해시문화체육관(봉황동 소재)에서 열었다. 1938년 11월 '항구의 처녀설'(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로 데뷔한 지 60년만인 1998년이었다. 김해에서 열린 이 공연에는 동료연예인인 원로 가수들이 함께 참여했다. 공연준비를 옆에서 도왔던 조카 장 씨는 "그때 외삼촌 형편이 좋지 않아 공연에 참가한 가수들이 분장실에서 김밥을 먹고 무대에 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외삼촌은 고향에서 60주년 기념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기뻐하셨지요. 공연을 마친 뒤 모두들 서울로 올라갔는데, 외삼촌은 우리 집에서 하루를 더 머물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공연을 기념해 김해시는 김영춘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귀하께서는 우리 고장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인기가수로서 수많은 국민애창곡을 불러 우리 고장을 빛내었으며 '홍도야 울지마라' 60주년 기념공연을 우리 고장에서 개최하여 시민 정서 함양에 이바지 한 바 크므로 이에 심심한 감사의 뜻을 이 패에 새겨 드립니다. 1998년 11월 20일 김해시장 송은복.'
 
김해시의 공로패 외에도, 후배가수 가수분과위원회 감사패(1979), 국방위원장 공로패(1995),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공로패(1984), ㈔한국연예협회 공로패(1987)를 받았다. 제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연예발전공로상(1996), 제35회 가수의 날 KBS 공로대상(2001)도 수상했다. 2004년에는 제4회 연예예술인 스승에 추대됐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한국대중가요사에 큰 획을 그은 김영춘의 '홍도야 우지마라'는 73년이 지나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노래이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이 노래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슬픈 이야기의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 김영춘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친구와 친지들, 가요계 관련자들에게 선물했던 한정판 대표곡 테이프의 앞면(위)과 뒷면. 조카 장영수 씨가 <김해뉴스>에 선물했다.

이번 취재 중에 장 씨는 김영춘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테이프를 선물했다. 대표곡 16곡을 모아 한정판으로 만든 이 테이프는 친구와 친지들, 가요계 관련자들에게 전달됐는데, 그 중 하나를 <김해뉴스>에 증정했다. 포장지도 뜯지 않은 귀한 테이프, 김해의 진짜 18번 '홍도야 우지마라'를 고맙게 받았다.

"노래는 유명하지만 가수는 잊혀져버린 듯 노래비 건립 절실해"
시 "시민 공감대 형성되면 추진 가능"

데뷔 60주년 기념공연이 김해에서 열린 이후, 김해에서 "김영춘 노래비라도 하나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김영춘은 공로패와 관련 자료들을 김해에 모두 기탁했다. 그러나 그 일이 매듭지어지기 전, 2006년 2월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김해문화원에서 김영춘의 공로패들을 보관하고 있다.
 
경기도 시흥 방산리에는 '홍도야 우지마라' 가요비가 세워져 있다. 노랫말을 지은 이서구 씨를 기념하기 위해 1995년에 세운 비다. 그러나 김해에는 아직도 김영춘 노래비가 세워지지 않았다. 아들 김무술 씨는 "노래는 유명하지만, 정작 가수는 잊혀져버린 듯 해 서운하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김해를 그리워했고, 김해사람임을 한 번도 잊지 않았던 아버지는 김해에 노래비가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서예가 허한주 씨는 "김해사람이라면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비를 누구라도 반가워할 것"이라며 "가수 김영춘을 김해가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해시 문화예술과는 "시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면 노래비 건립 추진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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