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인 1920년대. 평범한 집안에서 딸이 무용을 배우겠다고 나설 경우 부모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요즘이야 자식이 하고 싶다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세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딸이 무용을 배운다고 하면 반대하는 부모가 더 많았을 것이다.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이자 교육자였던 박외선(1915~2011) 선생도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용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춤꾼들을 기억하는 동안, 그들을 가르친 박외선은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김해 출신으로서 한국무용사의 여러 부문에서 '최초'로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제자와 후학들에게 '최고의 스승'으로 남아있는 박외선.
한 개인으로서의 박외선의 삶과 무용가이자 교육자 박외선의 모습을 함께 기억해 본다.

▲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이며 교육자였던 박외선 선생. 이 사진은 그의 장례식 때 영정 사진으로 쓰였다. 사진 제공=마종기 시인(미국 거주)
진영에서 태어나 현 대창초등 졸업
마산여고 진학 후 '무용가 꿈' 키워

박외선은 1915년 12월 1일, 진영에서 아버지 박상운 씨와 어머니 박말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영공립보통학교(현 진영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한 박외선은 어렸을 적부터 무용을 좋아했다. 박외선은 어릴 적 자신의 마음을 글로도 남겼다.
 
"단조로운 올갠에 맞추어 팔을 흔들고 발을 올리기도 하고 깡충 뛰기도 하는 유희도 어린 가슴에 한없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거리에서도 나직하게 노래를 부르며 손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또 뛰기도 했다. 한 쪽 팔에는 책보를 끼고 있었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유희를 생각했고, 또 선생님이 가르쳐 준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나 해서 실지로 해보는 것이다."(학술지 <세대> 제6권 통권 57호, 1968년 4월, 427쪽.)
 
이 대목을 읽으면, 나비가 팔랑거리듯 춤을 추며 시골길을 걷는 예쁜 소녀가 눈 앞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그는 6학년 때 학예회에서 담임교사의 지도로 '한 떨기 장미꽃'이라는 공연을 펼쳤다. 무용가 박외선의 비공식 첫 데뷔 공연은 진영대창초등학교 학예회였던 셈이다.
 
고3때 최승희 공연에서 첫 만남
서울로 직접 찾아가 무대에 출연
부모 반대에도 일본 유학 설득해 '다카다 세이코 무용연구소' 입소
현지 평론가들 호평 속 활동 왕성


이후 박외선은 마산여고에 진학했다. 단발머리 여고생 박외선은 "꼭 무용가가 될 수 있게 해주셔요"라고 밤하늘의 달에게 기도했다. 혼자서 춤동작 연습도 많이 했다. 그럴 만큼 무용이 좋았던 것이다. 열여섯 마산여고 3학년 때, 박외선은 마산극장에서 최승희(1911~1967. 무용인, 안무가. 월북예술인)의 공연을 보았다. 조선과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최승희의 공연을 본 박외선은 무용가가 되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무대 뒤로 찾아가 무용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고, 최승희로부터 서울주소를 받았다.
 
1930년 여름방학 때 박외선은 서울로 최승희를 직접 찾아나섰다. 당시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는 가을무용발표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최승희는 박외선을 테스트 한 뒤, 재능을 인정하고, 가을무용발표회 무대에 세웠다. 가슴 벅찬 무대였으나, 단 하루밖에 출연할 수 없었다. 개학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는 딸을 찾아온 부모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을 향해 펼친 박외선의 날갯짓은, 부모와 학교당국으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일탈일 뿐이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열정은 꺾기 힘들었다. 박외선은 일본문화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한다는 조건으로 마침내 부모로부터 일본유학을 허락받았다. 최승희의 소개로 1931년 '다카다 세이코 무용연구소'에 입소했는데, 조선인은 박외선이 유일했다. 입소한 지 4개월 만에 무대에 섰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던 박외선에게는 팬레터가 날아들었고, 일본 무용평론가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박외선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박계자'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박외선은 서울을 비롯한 아시아 순회공연도 다녔는데, 서울에서 공연할 때는 한 신문사에서 '조선 출신의 박외선이 일본무용단체의 일원으로 출연한다'는 호외를 발간하며 관심을 보였다.
 
1937년 잡지 <창공> 편집진의 부탁을 받은 이육사(1904~1944. 시인·독립운동가·기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스물 세 살의 박외선을 인터뷰 했다. 언제부터 무용을 제대로 배웠느냐는 이육사의 질문에 박외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 배우기는 17세! 글쎄 거기 무슨 동기라든지 이유랄 거야 있나요. 소학교 시대부터 무용이 좋아서 시작했지요!" 이 대답을 들은 이육사는 '이 작은 아씨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는 행복한 아씨로구나!'라고 생각했다고 기사를 썼다.
 
▲ 미국에서 노후를 보낸 박외선이 한국에 다니러 왔을 때, 이화여대 제자였던 정귀인(부산대 무용학과 교수)과 함께 춤동작을 해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 제공=정귀인 교수
최승희, 조택원(1907∼1976. 무용가)과 함께 무용계의 스타로 주목받던 박외선은 일본의 영화에도 출연할 만큼 일본 문화예술계에서 인정받았다. 그런 박외선과,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꼽혔던 마해송의 결혼 소식이 알려졌다. 빅뉴스였다.
 
마해송(1905~1966)은 1920년에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 홍난파 등과 도쿄 유학생 극단 '동우회'를 조직하는 등 문화운동을 전개한 당대의 지성인이었다. 1923년부터는 동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바위나리와 아기별'이 마해송의 대표동화이다. 마해송은 도쿄에서 예술잡지 <모던일본>를 발간했는데, 매월 80만  부가 나갈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마해송은 박외선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다고 한다. 조택원이 도쿄에서 무용발표회를 열기로 하고 <모던일본>의 후원을 요청하기 위해 마해송을 만났는데, 그때 박외선이 함께 자리를 했던 것이다. 마해송은 박외선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남겼다. "모자를 한 옆에 갸우뚱 얹고 은회색 양털 반코트를 입은 다리가 늘씬한 한 떨기 코스모스와 같이 깨끗하고 청초한 모습이었다."
 
일본의 유명 무용가 다카다 세이코는 "박외선은 예술가가 될 사람이지 가정주부가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반대했지만, 마해송과 박외선은 결국 결혼했다. 마해송은 박외선에게 '무대에 서지 말 것'을 부탁했고, 박외선은 이를 약속했다. 박외선은 이때의 결심을 "주인을 행복하게 한다면 어떤 일이라도 달게 받아들이겠다"고 자신의 글에서 회고했다. 사랑의 힘이 예술에의 열정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이후 박외선은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종기, 종훈, 주해 2남 1녀를 낳아 기르며 현모양처의 면모를 보였다.
 
장남 종기를 키우면서 쓴 육아일기는 잡지 <삼천리>에 게재되었다. <삼천리> 1941년 6월호에 실린 글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오랜 고통 후에 으앙 으앙 우는 네 소리를 들었다. 정신이 얼떨떨해 있는데 '참 좋은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간호부가 말했다. 고통과 걱정과 불안이 한꺼번에 없어지면서 까닭 모를 눈물이 자꾸 흘렀다. 아빠는 그저 기뻐서 몇 번이나 네 얼굴을 내려다보며 벙글벙글 하셨다."
 
▲ 경기도 파주의 묘비 앞에 선 제자와 유족. 왼쪽부터 제자 성기숙·정귀인·김화숙, 딸 마주해, 아들 마종기 부부, 무용평론가 조동화, 제자 육완순·정승희.
박외선은 평소 "무용과 일반 예술에서 제일 관계가 깊은 것은 시"라고 말했다. 무용가였으며 시를 사랑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장남은 훗날 한국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시인이 되었다. 미국에서 의사로 생활하며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는 마종기 시인은 무용가 어머니를 위해 시를 썼다. 이 시는 박외선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1953년 이화여대 체육학과 강사
김활란 총장에 무용과 개설 설득
1977년 퇴임 때까지 제자 육성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난 뒤, 박외선은 가정경제를 위해 무용교육자의 길로 들어섰다. 1953년 이화여대 체육학과 강사로 채용됐고, 1957년 부교수로 임용됐다. 박외선은 김활란 당시 이대 총장을 만날 때마다 무용학과의 개설을 설득했다. 1963년 2월,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학과가 이화여대에 개설됐다. 박외선은 1977년 퇴임할 때까지, 한국 무용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으며 수백명에 달하는 제자를 길러냈다.
 
퇴임 후, 자식들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노후를 보낸 박외선은 지난 2011년 9월 3일 세상을 떠났다. 마종기 시인은 경기도 파주에 아버지 마해송과 어머니 박외선을 합장해 모셨다. 마종기 시인은 김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작은 기사만 보고도 시카고의 장례식까지 와 준 정귀인, 육완순 교수님들께 너무 감사했다"며 "어머니 고향 김해의 신문인 <김해뉴스>에서 어머니를 '인물열전'으로 다룬다고 하니, 하늘나라에서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마종기 시인은 어머니의 영정 사진과 어머니의 묘비에 새긴 시 <舞踊·2>를 <김해뉴스>에 보내왔다.

장남 마종기 시인이 어머니 묘비에 새긴 시

舞踊·2

마종기
 
1
 
당신은 始終
맨발로 舞踊하지만
우리 어머니,
겨울눈도 뿌리는데
西大門 시장에서
구제품 구두를 사 신고
출퇴근 버스에 밟히면서
꿈같이 꿈같이 舞踊만 아는 어머니.
 
2
 
不隨意筋肉이 수축한다.
위궤양을 앓던 大學詩節
우리의 幕間은 길고
모든 計劃은 뿌리뽑혔다.
당신의 올린 두 팔에 모이는
數萬 메가 볼트의 靜止熱.
 
3
 
舞臺를 올리기 전에
相面의 시간과 장소를 確定할 것.
照明의 市街地를 벗어나는,
이렇게도 좁았던
生活의 半徑을 벗어나는
天使들의 娛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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