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담헌 김극검의 묘에서 내려다 보이는 여래리 마을 전경. 아래 월파정은 담헌이 만년에 점필재 김종직과 놀던 곳. 임진왜란 때 소실됐고 1959년 복원 후 몇 번 수축됐다.
지난 번 걸음에서 빠뜨린 데가 있다. 잊어서도 아니고 서둘러서도 아니다. 불친절한(?) 과거의 기록을 따라 현재의 땅 위에서 헤맸던 탐사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김해읍지> 능묘 조에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뒤에 등재되었고,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담헌(淡軒) 김극검(金克儉)의 묘를 찾았다. 묘를 관리해 오던 담헌공파 집안 분들께선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하시겠지만, "신용리 용전에서 본산리로 넘어가는 마곡산(麻谷山)에 있다"고 한 <김해지리지>를 따라 몇 번의 발걸음 끝에 얻은 소득이었다. 용전저수지 아래 'S-oil 경양주유소' 바로 뒤에서 공(公)이 만년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놀던 월파정(月波亭)을 찾았고, 그 위 김해김씨 담헌공파 묘역 가장 위에 있는 묘를 찾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월파정은 1959년의 복원 후에 몇 번 수축했고 2003년 1월에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1439(세종21)년에 태어난 담헌공은 학식이 뛰어나 생원시와 진사시에 잇달아 합격하고, 1459년(세조5)에 급제해 한림이 되었으며, 시문에 능해 1469년엔 시학문(詩學門)에도 선발되었다. <세조실록·예종실록·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성종 때는 승정원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1491년 홍문관부제학에 올랐다. 성종의 여진정벌을 반대하다 전라도·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안동대도호부 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성부우윤·호조참판·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다. 성품이 청렴 강직해 1499(연산군5)년에 돌아가실 때 저축한 재산이 하나도 없었단다. 다할 극(克), 검소할 검(儉)의 함자에 걸맞은 인생을 살았던가 보다. 묘를 지키는 두 문인석의 이마 모두에 3선의 주름을 새긴 것이 이채롭다. 묘 아래의 양지마을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공이 태어난 마을을 관찰사촌 또는 관찰동이라 불렀다 한다.
 
마산의 몽고정을 읊었던 우물(井)과 자성(自省)·자견(自見) 등의 시가 유명하나, 아내의 마음을 노래한 규정(閨情)이란 시가 마음에 들어 소개한다. "아직 한 겨울의 옷을 보내지 못해(未授三冬服), 밤늦도록 다듬이질을 재촉하는데(空催半夜砧), 은잔의 등불은 나와 같아서(銀?還似妾), 눈물이 다 마르고 마음만 태운다(漏盡却燒心)" 이렇게 우리 고장이 낳은 인물의 사적이 전파되지 않고 묘소조차 찾기 어려웠던 것은 경남 20개 시·군 가운데 유일하게 '시사(市史)'를 편찬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우리 시의 빈곤한 역사문화의식 때문이다.

▲ 월파정.
이제 지난번 발걸음으로 돌아간다. 진영신도시 동쪽 모퉁이의 119안전센터를 지나 은행·학원·커피숍 등의 4~5층짜리 상가건물 뒤쪽으로 진영중학교와 진영금병초등학교를 돌아본다. 진영중학교는 1930년 4월 도립김해공립농업보습학교로 시작해 1935년 3월 여래리에 자리잡았고, 1946년 9월 진영공립초급중학교가 되었다가 1951년 7월 진영중학교로 개칭했다. 1979년 2월에 32회 졸업식으로 폐교됐다가 2007년 3월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우여곡절의 학교사에서 생명력을 배우는 24학급 738명(남 386)의 학생들이 20대 김동주 교장 이하 38명의 교직원들과 공부하고 있다. 2006년 3월 개교의 진영금병초등학교는 46개 학급 1천119명(남 746)의 학생과 2개 반 43명의 유치원생들이 최인영 교장 이하 72명의 교직원들의 가르침을 받는데, 홈페이지를 보니 학년별 현장학습에 아주 열심인 모양이다.
 
학교를 나와 상가지구를 지나는데 아직도 정비가 덜 되었는지 간판이 난립하고 각종의 광고물과 남은 건축자재가 인도에 널려있다. 굴러다니는 쓰레기들도 어지럽고 본산공단에서 풍겨오는 악취문제도 심각한 모양이지만, 진영자이아파트는 행안부의 '우수Green마을'로 선정되었단다. 상 값 할 수 있는 깨끗한 도시로 개선되어 가기를 기대한다. 서어지공원 한 켠에 있는 진영건강증진센터(2006.12)는 모스그린의 유리창이 커다란 2층 건물에서 체력단련실(1층)과 내과·치과·한방의 진료실(2층)을 갖추어 시민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
 
김해대로에 나서 공설운동장교차로를 지나면 조금 황량한 아스팔트 벌판 위에 김해시문화체육센터·진영운동장·김해청소년수련관이 자리하고 있다. 1994년 5월 개관의 문화체육센터는 농구·배구·배드민턴의 각종 대회도 치르지만 시민들에게 대여되는 공간이다. 평일 오전인데도 적지 않은 배드민턴 동호인들이 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있다. 1987년 1월에 공설운동장으로 준공했던 진영운동장은 2008년 7월의 리모델링을 통해 녹색 인조잔디와 붉은 벽돌색 트랙의 콘트라스트가 눈부시게 되었다. 경사진 자연잔디의 외벽을 남긴 생각은 기특한데, 축구 골대 뒤의 농구장 1면과 족구장 2면은 조금 뜬금이 없다. 1998년 3월 개관의 김해청소년수련원은 지하 1층 지상 6층의 공간에 숙소·대소강당·헬스장·에어로빅실·컴퓨터실 등을 갖추었다. 각종 행사와 수련회의 대여가 주를 이루지만, 별자리캠프·가야유적탐방·하수처리장견학·뗏목수상훈련 같은 50여종 이상의 자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 광대현삼거리(위)/ 진영갈비 거리(아래)
김해대로 양쪽으로 협성팔레스(2001.12, 445세대), 거성(1997.7, 342세대), 도남아트빌(2000.11, 137세대)을 지나는데, 대근아파트(1991.11, 197세대) 앞에서 광대현삼거리란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광대에 고개 현(峴)이니, 광대들이 줄타기 하던 고개마을이었다는데 1914년에 좌곤리에 포함됐다. 고개를 넘으면서 갑자기 여러 갈비집의 입간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전의 성세는 아니지만 인근에선 제법 알려진 진영갈비마을이다. 좌곤리는 북쪽 자(子)에 마을의 '말'과 같은 발음의 '맏' 곤(昆)이니, 금병산의 북쪽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생각되고 있다. 김해대로68번길 안에 자리한 마을회관과 100여 호 정도가 좌곤마을이다. 좌곤삼거리를 지나 좌곤교를 건너면 창원시 동읍이 되면서 길은 의창대로로 바뀌지만 우리는 삼영화학·진영국도관리사무소의 표지판이 붙은 하계로로 들어간다.
 
하계로 초입의 김해금산초등학교는 1949년 10월 개교 후 1953년 6월에 이리로 이전했다. 6개 학급 97명(남 51)의 학생과 1개 반 22명의 유치원생들이 임일규 교장 이하 18명 교직원들의 보살핌으로 자라나고 있다. 읍내가 바로 지척인데도 학생 수에서는 그 쪽 학교와 많은 차이가 있다. 학교 뒤쪽에 새로 들어선 하우스스토리(2008.3, 325세대) 이름엔 동창원이 붙어있지만 행정구역은 분명히 김해시 진영읍이다. 대한민국 금속주조공예 변종복 명장의 작품인 황금색 우주탑(칠보탑)이 대웅전 위에서 빛나는 한마음선원(경남중부지원), 국토해양부 진영국토관리사무소(1975.6), 붉은 벽돌 은빛 첨탑의 동산교회를 지나 동산마을의  표지석과 마을회관이 있다. 1914년에 방동마을과 병합해 방동리(芳洞里)를 이루게 되었다. 동변(東邊)으로도 불렸다는데, 금병산이나 읍내에서 보아 결코 동쪽이 될 수는 없다. 조선시대 역원의 창원 동읍 자여마을에서 보았거나, 마을 서쪽의 주항천이 '샛강'으로 불리고 서쪽의 들판이 '샛들'로 불렸던 탓에 '샛바람=동풍(東風)'처럼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야 인접의 동읍과 동판저수지의 이름 모두가 공통된 유래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 논 한가운데 섬 같은 산이 집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사산리.
답사의 편의상 위쪽의 방동마을은 나중으로 하고, 사산교(1998.8)로 주항천을 건너 사산리로 간다. 집 사(舍)에 뫼 산(山)이다. 논 한 가운데 있는 섬 같은 산이 집처럼 생겼다 하여 그렇게 불렀단다. 노적봉으로도 불렸던 것을 보면 옛날에는 낙동강이나 동판저수지의 물이 출렁거리던 섬이었던 모양이다. 사산을 둘러싼 70여 호의 마을이 있고, 남해고속도로  가까운 쪽에 사산교회와 마을회관이 있다. 서쪽으로 논을 가로질러 단계로에 나가 창원의 자여마을을 지나 자여로115번길로 서천저수지 아래서 서천교(2008.3)로 주항천을 다시 건너면 진영읍 우동리 서천마을이다. 마을회관을 지나 산자락을 오른쪽으로 돌면 우동마을이다. 흰색 마을표지석 앞에는 운강 성종호(成宗鎬; 1890~1976) 선생의 송덕비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신학원을 세워 초등교육에 헌신했고, 유도회(儒道會)를 설립하고(1965), 성균관장(1967)과 도산서원장(1970)을 역임하면서도 마을 일을 집안일처럼 챙겼던 덕을 기린다고 쓰여 있다.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을 보좌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사장 등을 지냈으며 대한화섬과 대성모방을 설립해 '섬유한국'을 일으켰던 기업인 성상영 씨가 선생의 아들이다.
 
버스정류장과 마을회관을 지나면 500살이 넘은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쪽은 풍성하고 한쪽은 앙상하다. 1996년에 시보호수로 지정되었건만 2008년에 한쪽이 고사해 버렸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팽나무도 100~200년은 족히 돼 보이는데 공장이 없는 오지라 그런지 작은 개울이 편안하다. 맞은편에 웬만한 서원이나 절집 크기로 자리한 창녕성씨의 재실 태평제(太平齊) 때문에 성씨마을처럼 보이지만 정작 느티나무의 소유자는 300년 전에 삼방동의 영운마을에서 옮겨온 함종어씨다. 150년 전 입향의 창녕성씨보다는 한참 선배로 우동이 '어(魚)터'로도 불렸던 뿌리였다. 함종어씨와 사돈을 맺었던 연유로 당산나무 앞에 재실을 세울 수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 세조 때 종사관으로 대마도에 건너갔다 풍랑으로 희생된 어효선(魚孝善) 공이 입향조였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선 이미 40년 전에 4~5세기 목곽묘와 석곽묘의 가야고분군이 확인되었지만 발굴조사는 없었고 도굴피해만 극심할 뿐이다.
 
▲ 우동 당산나무.
진영휴게소 옆 굴다리로 들판을 가로질러 경남농업기술원 진영단감연구소(1994.5)를 지나 하계로에 돌아오면 국가유공자를 위한 김해보훈요양원(2009.8, 원장 이회룡)이 맞은편에 말끔하다. 동쪽으로 방동마을회관을 지나 길 왼쪽에 '애국지사 안창대 묘'의 표지판이 보여 따라가다 묘는 찾지 못하고 폐허가 된 창녕성씨의 재실 금산제(錦山齊)를 돌아보았다. 1984년 5월에 세워진 운강선생의 송덕비와 성상영 씨의 기적비가 있다. 안창대 선생은 1933년 경성에서 항일사회주의운동을 전개했던 공로로 2005년 삼일절에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 운강 성종호 선생 송덕비.
조금 동쪽의 하계리마을회관 앞뒤로 50여 호의 하계마을이 있다. 연꽃 하(荷)에 시내 계(溪)니 연꽃피던 시내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계로를 계속 오르면 내룡리의 진우원과 금병공원(본 기획 5월 23일자)으로 넘어가는 용지고개가 되지만, 되돌아 남쪽 하계로240번길로 '떡고개'를 넘어 오척마을로 간다. 까마귀 오(烏)에 길이 척(尺)이라 임진왜란 때 명의 진린장군이 오산으로 전사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금 까마귀가 내리는 명당자리가 있기 때문이라 하는데, 까마귀 나는 것으로 거리를 재던 오지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다. 떡고개길 오른쪽에는 요업으로 유명한 삼영산업(1978.7, 크리스털·타일)이 있는데, 김해로 돌아올 때 언제나 남해고속도로에서 보이는 그 공장이다. 왼쪽에는 어느새 조성공사를 마치고 입주를 시작한 하계농공단지가 있다. 단지조성에 앞서 실시되었던 2009년 12월의 발굴조사에서는 '철의 왕국, 가야'의 실재를 증명해 주는 제철용광로가 처음 검출되기도 했다.
 
오척마을회관을 지나 옛 김해터널을 통해 진례로 나섰다가 청천교를 지나 응봉산(280m) 너머의 의전리로 간다. 응봉산 동쪽 자락에 안평·의전·등리 마을 들이 늘어서 있는 의전리는 개미 의(蟻)에 밭 전(田)이니 개미뜰이다. 3개 마을을 합해 150여 호 남짓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진례·진영나들목(IC)의 개설 이후 공장 입주의 물결이 거세다. 7073부대를 지나면 외촌·죽곡·세일·유목마을로 이루어진 죽곡리가 된다. 신항만배후철도의 터널이 뚫리면서 5세기 대 약 100여 년 동안 조성되었던 130여 기의 가야고분과 1천242점의 유물들이 발굴조사되었다. 700여 점의 토기들은 창녕·함안·고성 등과 같은 다른 가야세력들과의 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고모삼거리와 진영세일아파트(2001.11, 288세대)를 지나면 김해에서 가장 일찍 조성된 진영농공단지(1997.5, 51개 업체)가 있는데 연륜만큼 굵어진 가로수들의 그늘이 시원하다. 금병산을 시계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돈 진영순례기는 이것으로 다한 모양이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