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 박외선은 훌륭한 선생이었고 또 아름다운 무용가였다. 1971년에 이화여대 무용학과에 입학한 정귀인 부산대 무용학과 교수는 학부 시절 내내 제자로, 대학원 시절에는 조교로, 박외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정 교수는 말했다. "선생님은 서 있는 자태만으로도 무용가이셨죠. 지적인 분위기, 아름다움, 그리고 우아한 품위까지. 무용가로서 모든 것을 갖추고 계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을 닮고 싶었어요.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될 수 있을까 하고 늘 생각했답니다."  

▲ 젊은 시절 박외선의 아름다운 모습은 지금도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진제공=정귀인 교수
"무용과 가장 가까운 예술은 시"
 -이육사와의 인터뷰 중

2011년 9월 3일 오전(미국 현지 시간) 박외선이 세상을 떠났다. 정귀인 교수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공항으로 달려갔다. 스승이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해 드려야 했다. 인천공항에서 시카고행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대기자 등록을 한 뒤 초조한 몇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시카고행을 취소한 승객이 한 명 있어 표를 구할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통화를 할 수가 없어, 서울에 있던 정 교수의 딸이 박외선의 딸 마주해 씨에게 계속 전화를 했다. 정 교수가 시카고 공항에 내렸을 때, 마주해 씨의 미국인 사위가 '정귀인'이라는 한글이 적힌 종이를 거꾸로 든 채 마중나와 있었다.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다더니, 마주해 씨 전화번호 하나만 들고 무작정 비행기를 탔는데 다행히 유족과 연락이 됐어요. 선생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는 장례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관에 누워계셨지만, 선생님은 너무 아름다우셨어요."
 
장례미사는 시카고 정하상 바오로 한인 성당에서 열렸다. 정 교수는 "우리 선생님, 생전에 귀걸이를 좋아하셨는데 안하고 계시네요. 선생님이 평소에 '귀인아 나는 귀걸이가 너무 좋아. 죽어 관 속에서도 귀걸이를 하고 갈거야'라고 말씀하셨는데…"라는 말을 딸 마주해 씨에게 건넸다. 마주해 씨는 어머니의 귀에 귀걸이를 달아드렸다. 살아있을 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박외선은 세상을 떠났다.
 
정 교수는 박외선의 애제자였고, 조교였으며, 박외선이 한국에 다니러 올 때면 정 교수 집에서 한 달씩 머물렀을 정도로 딸 같은 존재였다.
 
또 한 명의 제자 육완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은 시카고로 바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다른 공항들을 경유한 뒤에야 장례식에 참석했다. 박외선의 아들 마종기 시인은 "한국에 있는 어머니 제자분들께 미처 연락을 못 드렸는데, 먼 하늘길을 날아 와 주어 너무 감사했다"고 당시의 일을 전했다.
 
1953년 이화여대 강사로 교육입문
1960년 체육학과 교수 된 후 무용학과 독립 개설 위해 노력
1963년 2월 간절히 바라던 꿈 이뤄 국내 최초 무용이론서도 펴내


박외선은 남편 마해송과 함께 1948년 서울 명륜동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마해송이 발표한 동화가 큰 호응을 얻었지만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박외선은 1953년부터 이화여대 체육학과 강사로서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직접 무대에 서는 게 아니었기에 마해송도 반대하지 않았다. 1960년 체육학과 교수가 된 박외선은 무용학과의 독립 개설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김활란 총장에게 무용학과 설립을 수차례 건의했다. 1963년 2월 드디어 이화여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무용학과가 개설됐다. 일등공신은 박외선이었다.
 
▲ 동화작가인 남편 마해송 씨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박외선.
정 교수가 회고하는 박외선은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인이었다. "선생님은 탁월한 안무가였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한 동작에 익숙해 질 때까지 반복 연습시키는 스타일이었는데, 선생님은 순간적인 창의성을 곧바로 적용하는 쪽이었습니다. 예술은 즉흥적이고 창의적이란 점에 비춰봤을 때 선생님은 춤의 천재였습니다."
 
박외선은 강의실 창 밖에 비가 내리면, 그 감상을 그 순간 추고 있던 춤에 바로 접목시켜 표현하도록 가르쳤다. 그런 식의 안무와 강의는 제자들의 가슴에 즉흥적 발상과 순발력, 창의력을 심어주었다. 정 교수는 "선생님은 굉장한 창의력을 거의 매순간 보여 주셨는데, 저로서는 그런 방식이 너무 좋았지만 어떤 친구들은 힘들어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박외선은 국제무용세미나와 해외무용연수 등에 매년 참석하면서 해외무용의 동향을 파악해 국내에 소개했다. 마사 그레이엄의 현대무용 기법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한때 주목받는 무용가였던 박외선은, 대학 강단에서 순수 공연예술로서의 창작무용과 학문적 이론의 영역 두 분야를 아우르는 교육자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이론서인 <무용개론>은 박외선의 저서이다.
 
정 교수는 4학년 때 '박외선 현대무용공연' 무대에 섰던 일을 잊지 못한다. 1974년 12월 21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이 공연에는 주연 무용수 외에 박외선의 제자들도 출연했는데, 정 교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 공연의 1부 작품 '대지의 무리들'은 김수영(1921~1968. 시인)의 시 '풀'을 소재로 했다. 음악은 아들 마종기 시인이 선곡했다. 정 교수는 "70년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생각한다면 김수영의 시를 무용의 소재로 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갖는 공연이었다"고 말했다. 2부 '고별'은 1966년 사별한 남편 마해송에 대한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당시 무용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두고 '단순히 무용을 위한 주제가 아니라 그의 삶과 역사가 실려 있는 체험의 미학이자 혼의 울림'이라고 평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 시인 이육사와의 인터뷰에서 '무용과 가장 가까운 예술은 시'라고 했던 박외선은, 한 영혼의 깊은 사색을 무대에서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화작가이며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남편 마해송,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통찰을 세련된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아들 마종기 시인. 그리고 선생님. 그분들은 서로 영향도 받고 함께 나란히 걷기도 하면서,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가지 않았을까요."
 
반복연습보다 창의·즉흥성 중요시
해외무용 동향 국내 소개도 치중
후배들 설자리 위해 1977년 퇴임, 퇴직금 전액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제자들 결성한 '이화춤사랑모임' 박외선 추모사업 진행하고 있어


박외선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머니처럼, 언니처럼 제자들을 보살펴 주었다. 정 교수는 대학 3학년 때 박외선의 소개로 한 여자고등학교 무용반의 안무를 맡았다. 이 학교 학생들은 이화여대 주최 무용대회에서 군무 부문 1등을 한 터였다. 정 교수는 그 때 받은 수고비로 부모의 속옷과 스승의 잠옷을 샀다. "잠옷을 들고 집으로 찾아갔는데 선생님이 바로 입어보시면서 활짝 웃어주셨죠. 선생님과 함께 음식도 만들어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과 제자는 몸을 부딪치니까 혈육같은 관계가 됩니다. 선생님은 제게는 비밀이 없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가족같은 분이셨습니다."
 
박외선의 제자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있다. <무용>(1971, 문예진흥원 발간)에 쓴 '무용가가 되기 전에 참된 인간이 돼라'는 글을 보면, 제자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는 기쁨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 이화여대 교수 시절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
"밤에도 학생들과 무용에 맞는 음악을 찾으러 다니거나 그밖에 개인적으로 찾아와 지도를 받으려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의 자유시간은 잠자는 때밖에 없는 수가 많습니다.(중략) 한창 청춘을 추구하는 발랄한 여대생들, 꿈이 크고 감정이 풍부한 그들과 같이 호흡하고 어울려 생활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내 젊었을 때의 기운을 다시 찾은 듯 쌓였던 피곤이 확 풀려 버리곤 합니다."
 
이화여대 무용학과에서 23년을 근무하는 동안 수 백 명의 제자를 가르친 박외선은 1977년 정년을 3년 남겨 둔 채 퇴임했다. 대쪽같은 성품이었던 그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무용계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평소 구제품 시장에서 구두를 사 신고 다닐만큼 검소했던 그는 퇴직금 전액을 무용학과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무용교육자로서 연구하고 만들어낸 작품 자료와 안무 자료는 정귀인 교수에게 모두 주었다. 정 교수는 "선생님께서 '이 자료를 가지고 있어야 할 사람은 너다'라고 하시면서 자료를 주셨다. 그 자료도 정리하고, 선생님에 대한 책도 쓸 계획이다"라며 은사를 그리워했다.
 
박외선은 현재 이화여대 출신 무용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또 한국현대무용의 진정한 어머니로 기억되고 있다. 지난해에 열린 추모공연에서 정 교수는 김수영 시인의 '풀'을 낭송했고, 그 낭송에 맞추어 제자 남정호 한예종 무용원 교수가 춤을 추었다. 박외선의 제자들은 추모식 직후 '이화춤사랑모임'을 만들어 박외선 추모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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