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일하게 남은 결혼식 당시 사진
김해시 삼계동 김경희(49·여)씨가 지난 해 12월 타계한 아버지 김동창(향년 78세)씨의 일대기를 보내왔습니다. <김해뉴스>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고도 성장기를 온 몸으로 겪어낸 그의 이야기를 3차례로 싣습니다. 평범한 개인들의 삶일지라도 후세에 좋은 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김해뉴스>의 믿음입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독자 여러분의 투고를 환영합니다.


북한군 → 전쟁포로 → 국군 → 카추사로 인생 유전
"좋은 역사 만들어 후세들 행복해졌으면" 유언

기약 없는 수용소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제 74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물이 고인 논바닥에 가마니를 깔아 놓은 엉성한 막사였다. 약 7천명 포로들의 식사는 엉망이었다. 새벽부터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 막사까지 오는 중 갑자기 샛바람이라도 불면 식기에 든 밥은 다 날아가 버린 날은 굶는다.

나는 수용소의 서무계에서 일을 했다. 물론 보수직은 아니지만 하루 세 끼에 덧밥이라 하여 1인분의 밥을 더 먹을 수 있었다. 외부작업을 가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부실한 식량과는 달리 옷은 대량 보급됐다.남는 옷으로 민간인들과 떡과 소금 등 음식과 물물 교환했다.

수용소 내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싸움이 시작됐다. 우익은 대한민국을, 좌익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층으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세력 다툼이었다. 반공포로의 수용소에는 태극기, 친공포로 수용소에는 인공기가 나뉘어 걸렸다.

▲ 대서소를 운영할 당시
수용소 간의 투석전은 이어지고 연일 이어지는 시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러나 미군은 우리를 방관했다. 친공 포로들은 인민군 복장을 하고 대한민국을 비방하며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시위를 하는 반면 내가 있는 반공포로 수용소는 조용했다.

이 무렵 전선은 38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이루며 전쟁의 열기가 뜨거운 반면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제는 포로교환이었다. 반공포로들은 이북으로 가지 않는다 하고 북측에서는 포로를 전원 송환하라고 했다. 결국엔 중립국 감시 위원단의 입회하에 자기의 뜻을 밝혀 송환 희망자와 거부자를 구분하기로 했다.

나는 갈등했다. 부모형제가 그리운 고향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이북 행을 택해야 했다. 그러나 생지옥 같은 그곳을 다시는 가기 싫었다. 몇 일 간 고심 끝에 나는 잔류를 택했고 광주로 이송됐다.

얼마 휴전협정이 타결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용단을 내렸다. 이것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반공포로 석방 작전이다. 6월 17일, 갑자기 한국군 헌병이 막사로 들어와 명했다. "대통령께서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를 기하여 전국에 수용되어 있는 반공포로들을 일제히 탈출, 석방 시키라는 특별명령을 내리셨다. 2시가 되면 광주 사월산 정상에서 조명탄이 발사된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일제히 탈출하라." 물론 미군은 모르고 있는 대통령 독단의 석방 작전이었다.

산 위로 조명탄이 발사되는 순간 우리는 일제히 수용소를 탈출했다. 곧바로 미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나는 무조건 산중을 향해 달렸다. 다음 날 오후가 되니 마침내 산중턱에서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산중에 있는 석방된 모든 포로들은 이 마이크 소리가 나는 곳으로 하산하라." 우리들을 도울 봉사자들이니 안심하고 하산하라는 방송이었다.

탈출 후 처음 도착한 곳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이었다. 보성경찰서에 신고하니 근처 고흥의 고요한 어촌마을로 배치됐다. 때는 농번기라 모내기 일손이 매우 딸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보릿고개라 식량은 바닥날 형편이었다. 결국은 마을 이장이 찾아와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우리에게 떠나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군대에 자원 입대해 급한 의식주라도 해결 해야겠다는 생각했다. 읍사무소에 입대 신청을 했다. 군에서는 인적자원이 부족해여 강제 징병을 하는 때 굴러들어온 떡을 반가히 맞이했다. 지긋한 군 생활을 또 해야 할 생각에 몸서리 쳤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소대 병기계의 직책을 맡아 비교적 쉬운 훈련을 받았다. 어느 날, 미 7사단에서 UN군(카추사)에 배속시킬 사병을 차출하기 위해 왔다. 다른 사병들에 비해 학력이 높았던 나는 미군 특급열차에 몸을 싣을 수 있었다. 3개월 후 나는 대구에 있는 미군 부대로 옮겼다. 생활이 안정되자 고독감이 몰려왔다. 남들은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간다며 난리 법석이지만 우리는 갈 곳이 없으니 더 더욱이 그랬다. 집 없고 고향 없는 설움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선을 보기 시작했다. 친구 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다. 몇 달 간 교제 끝에 1954년 10월 3일 결혼했다.

▲ 부인과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모습
신혼생활 6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가정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근무 도중 업무상 실수가 빌미가 돼 한국군으로 복귀하게 됐다. 복귀하니 UN군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하여 구박과 구타가 심했다. 당시 나의 계급은 상병이었으니 힘도 없었다.

그러다 부관 참모부에서 2명의 사병을 차출하러 왔다. 테스트를 본 후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히 최종 합격했다. 새로 모실 참모는 같은 평북출신의 실향민이었다. 덕분에 날 아껴주셨다. 하지만 곧 군 생활에 실증을 가졌고 제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참모에게 제대하고 싶다고 간청하여도 빈번히 거절당했다. 하늘에 별따기와 같은 제대였지만 결국 나도 1955년 10월 19일 제대특명이 났다. 마침내 사회인으로의 첫 출발 하게 됐다.

막상 제대는 했으나 당장 호구지책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업자 신세로 대구역 앞을 배회하다 중학교 동창으로부터 사촌형님과 매부가 부산에 피난을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 영도 봉래동에서 재회했다. 이산가족의 만남인 그 당시가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는 서로가 헤어지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리해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어느 날 물건을 구하기 위해 대구로 가던 중 예전에 모셨던 참모를 만나 병사구 사령부에서 일하는 게 됐다. 그러다 우연히 문전성시를 이루는 부대 앞 대서소를 보았다. 26세가 되는 해에 대서사 허가를 취득하고 사무소를 본격적으로 개소하여 업무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힘이 났고 수입도 좋았다.

꿈만 같은 기적이었다. 개업한지 불과 두 달 만에 영도구 신선동에 22평짜리 집 한 채를 마련하게 됐다. 그렇게 나는 1남 2녀의 자녀를 두고 대소서를 운영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면서 머지않아 인생을 마감해야하니 허무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부디 후세들은 나와 같은 인생을 되풀이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운 고향산천과 어머니 형님과 동생, 북에 있는 온 가족들이 참으로 보고 싶다. 혈육의 정이 그립다.


정리 =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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