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죽 배병민(又竹 裵秉民·1875~1936)은 차산 배전(1843~1899·조선말 개화사상가·시인·서화가. 
김해뉴스 지난 2월 22일자 '인물열전' 참조)의 직제자이다. 차산의 화풍을 이어받아 문인들의 정신세계를 담은 사군자를 주로 그렸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우죽은 일제강점기하에서 일본인들이 주관하는 전람회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영남지역 명문가들은 그의 그림을 좋아했고, 다수 소장하고 있다.
후손들의 증언과 '김해전통서화연구회'의 도움을 받아 우죽의 화풍과 삶을 살펴본다.

▲ 우죽 배병민의 '사군자 8곡병' 중 4폭. 일제강점기 이후 서양화가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영·호남 문인화가들은 사군자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방편으로도 활용했다. 사진제공=김해전통서화연구회.

우죽은 김해읍 답곡리(현 김해시 대성동 논실)에서 아버지 배석모와 어머니 황노성 사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개성이 강했는데, 특히 그림 그리고 글씨 쓰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차산 배전에게 서화의 기초 수련
남종문인화풍의 사군자화 계승
특히 묵포도 그림에서는 일가 이뤄

스승인 차산은 딸만 셋을 두었으니, 우죽은 제자를 넘어 아들과도 같은 존재였다. 우죽이 차산의 아들 혹은 양아들이라고 잘못 전해질 정도로 각별한 스승과 제자였다. 스승과 제자는 1897년 신어산 서림사(현 은하사) 취운루에서 함께 시를 지었는데, 종이에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시판(詩板·시를 새긴 목판)으로 남겼다. 시판은 은하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두 사람의 깊은 정을 짐작하게 한다.
 
우죽은 김해문인화맥의 개조인 차산에게서 서화의 기초를 배웠고, '남종문인화풍(인간의 내적 진리 추구를 중요시하는 문인들의 정신세계를 담은 그림으로, 화공들의 그림과 구분하여 부르는 이름이다)'의 사군자화를 계승했다. 따라서 우죽의 문인화에서는 조선후기 이후의 전통적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우죽은 사군자를 잘 그렸는데, 특히 대나무 그림과 매화가 뛰어났으며 묵포도 그림에서는 일가를 이루었다.
 
이나나 미술사학 박사는 논문 '영남 문인화맥의 새로운 축, 김해의 문인화'에서 우죽의 화풍에 대해 이렇게 썼다. "배전보다는 한층 더 과감한 묵필법을 선보이는 그의 묵매화는 특히 그만의 개성이 있다. 배병민의 '목매도'는 농담의 변화가 적으면서 매화의 노간이 과장되게 휘어지고 각이 지게 꺾이면서 마치 용틀임하듯 힘차게 끔틀거린다. (중략) 배병민은 당시 서울 화단과 대구 화단 등에서 유행하고 있던 중국의 신문인화풍보다는 배전을 통해 습득한 남종문인화풍을 고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죽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는 혼돈과 모순의 시대에 아석 김종대(1873~1949. 김해뉴스 4월 11일자 '인물열전' 참조), 매산 황영두(1881~1957), 동초 황현룡(1883~1960), 벽산 정대기(1886~1953) 등과 함께 활동했다. 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우죽은 김해의 역사와 교육 그리고 문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을 했다. 1928년 김해의 유림들이 결속한 '김해읍지속수회'에서 아석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했다. 1603년(인조 8년)에 처음 편성되고 수차례 증보된 <김해읍지>를 속간했다. 김해공립보통학교(현 동광초등학교)의 기성회 임원을 맡아 학교 설립에도 관여를 했다.
 
일본을 미워했던 우죽은 저항적인 신지식인들이 많이 모였던 교회에 관심을 갖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김해성결교회가 외할아버님부터 시작된 신앙의 뿌리이지요. 어머니도 목사이신 아버님(김윤건)과 혼인을 하셨습니다"라고 외손 김경희 씨(76·서울)가 말했다.
 
수암 안병목·시암 배길기 등
후학들에 예술정신과 화풍 큰 영향
김해읍지 속간 작업 주도적 역할
김해공립보통학교 설립에도 관여


우죽의 예술정신과 화풍은 수암 안병목(1906~1985. 김해뉴스 지난 5월 9일자 '인물열전' 참조)과 시암 배길기(1917-1999) 등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시암은 청년 시절 우죽의 제자로 입문해 사사했다. 훗날 한국서예협회를 창립하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서예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시암은 우죽에 대해 "스승님이 만약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셨다면, 그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후세에 남을 많은 작품과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재능으로 말하면 내가 어찌 감히 그 어른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우죽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우죽은 평생 김해에서 은거하며 선비화가로 살았는데, 우죽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얻기를 원하는 영남의 소장가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석과 우죽의 작품을 함께 소장하여 감상하고 있는데, 소장자들은 주로 영남일대의 명문가들이다.
 
김경희 씨는 외증조할아버지(배석모)가 아들 배병민을 서예가나 화가가 아니라 학자로 키우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부친이 분성산 타고봉 아래 있는 성조암의 주지스님께 아들에게 한문과 불교교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느 날 부친이 아들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궁금해 성조암에 들렀어요. 아들이 공부를 잘 하고 있느냐고 묻자, 주지스님은 부친을 성조암 뒤편 큰 바위로 안내했습니다. 어찌된 까닭인지 바위는 새까맣게 변해있었습니다." 바위가 그렇게 된 까닭은 공부보다 그림과 글씨 쓰기에 열심이었던 소년 배병민이 숯으로 바위에 수도 없이 그림을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렸기 때문이다. 바위는 화폭이었고, 숯은 붓 대신이었던 것이다.
 
▲ 월간 서예문인회 2011년 7월 117호 표지로 실린 우죽 배병민의 '사군자 10곡병'중 7,8폭.
"화가 난 부친이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크게 꾸짖었는데, 그저 굵은 눈물을 밥상 위에 뚝뚝 흘릴 뿐이었답니다. 잠시 후 부친이 보니, 아들이 어느 순간 그 눈물을 이용해 손가락으로 밥상 위에 학 한 마리를 그려 놓았더라는 거죠. 자세히 살펴보니 학이 금방이라도 비상할 듯 절묘한 솜씨였답니다. 그 때 부친은 '이 아이가 하늘로부터 재주를 타고 났구나. 인간의 의지로 말릴 일이 아니로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결국 아들이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그림과 글씨 쓰는 것을 허락한 것이죠. 외할아버님 어릴 적의 이야기를 어머니한테서 전해 들었습니다."
 
우죽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딸 배복남(98) 씨는 아직 생존해 있다. 자식들에게 우죽의 이야기를 많이 전해주어, 취재 도중 마치 살아있는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우죽에 대한 일화들을 들을 수 있었다. 우죽은 딸을 특히 사랑했다. 배복남씨는 우죽이 평소에 교유하던 윤백남(1888∼1954. 극작가·소설가·영화감독. 1918년 김해합성학교 교장 역임.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소설인 '대도전'을 지었다)에게 학문을 사사한 재원이었다.
 
김경희 씨의 동생 김선희(74) 씨도 어머니한테서 전해들은 이야기 한 편을 소개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림과 글씨 뿐만 아니라 공작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집이 너무 가난해 혼례에 사용할 원앙을 살 돈이 없어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외할아버지는 젊은이에게 목침을 두 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 목침 두 개를 직접 깎아 한 쌍의 원앙을 조각하고 색을 칠했지요.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던지, 혼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무도 나무로 깎아 만든 원앙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우죽의 원앙 선물 덕분이었는지, 이 젊은이는 훗날 자수성가 했구요."
 
우죽은 생전에 서림사를 자주 찾았는데, 딸 배복남 씨는 자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신선 같은 분이셨다. 목이 길고 키도 훤칠한 미남이었기에 많은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육식을 피했으며 주로 솔잎을 말려 갈아 물에 타 잡수시곤 했다. 항상 흰 고무신과 모시 적삼을 입고 성조암과 서림사를 오르내리며 자연과 벗하셨다. 간혹 서림사에 늦게까지 계시다가 이른 새벽 집으로 돌아올 때면, 흰옷 입은 묘령의 여인이 아버지의 어두운 산길에 길잡이가 되어 집 앞까지 왔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우죽의 일화 중 멋스러운 이야기 한 대목이다.
 
김선희 씨는 배경호(김해 읍장을 지낸 배기상 씨의 아들) 씨의 증언을 들려주었다. "김해 군수나 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인사들은 으레 우죽의 작품을 구하려고 수소문을 했다. 그러나 비싼 값을 내놓고 구하려 해도, 작품을 소장한 사람들이 팔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영남의 명문가들에서 우죽의 작품을 많이 구입해버려, 정작 고향인 김해에서도 우죽의 작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우죽의 8폭 병풍 하나를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우죽의 후손들 역시 작품을 한 두 점 씩만 간직하고 있을 따름이다. 외손인 김경희·김선희 씨와 친손자인 배기경(55) 씨는 우죽의 작품이 전시되는 곳이면 항상 달려간다. 이들 후손들은 지난해 12월 김해문화의전당에서 열린 '김해전통서화의 맥'에 전시된 우죽의 작품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김해로 왔다. 배기경 씨는 "할아버님의 작품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도록 감격했습니다.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지요. 한편으로는 후손이 되어 할아버님의 작품을 잘 보관하지 못하고 전시회에 와서 보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며 "할아버님의 예술세계가 다시 재조명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술정신을 알아준다면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경희 씨를 비롯한 우죽의 후손들도 김해에서 자랐다. 김경희 씨가 가장 나이가 많은데, 배기경 씨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촌들을 한 형제처럼 돌보며 자랐다. 김경희 씨는 "외할아버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김해뉴스>가 고맙다"며 "김해전통서화연구회와 대표 김현대 씨한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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