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과거를 반추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와 단절된 미래를 설계하는 데 힘을 쏟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을 키워 갈 수 있게 하는 힘은 과거에 대한 의미있는 반추에서 시작된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는 이런 고민과 반추의 결과물이다. 이 책에는 문화사적으로 의미있는 사건이자 정치적·사회적 큰 이슈였던 활자의 발명이 가져다준 의미와 한계를 직시하며, 묵묵히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조선 책벌레'들의 이유있는 완고함이 잘 나타나 있다. 책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책이다.
 
"고려와 조선이 어떤 책을 찍었던가, 어떤 사람이 어떤 의도에서 책의 내용을 쓰고, 책을 제작하고, 책을 보급하고, 책을 소유했던가?" 이 책의 저자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서구의 근대를 여는 결정적인 도구로 시대적 역할을 감당했다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우리의 책이 어떤 역사적 역할을 했는지 묻고 있다. 뛰어난 활자 제조기술을 가졌던 조선과, 문화강국이라 자부하지만 빈약한 콘텐츠를 소유한 우리시대를 향해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2세기나 앞서 존재했으나, 인쇄·출판 전체에 원활하게 활용되지는 못했다. 태종을 거쳐 세종에 이르기까지 계미자 갑인자 등 다수의 금속활자가 개량되어 다량의 서적이 출간되었지만, 금속활자는 여전히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성리학적 윤리서(삼강행실도)와 사대부를 위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보급하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금속활자는 시대의 소명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 세계관을 담은 서적들은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의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런 연유에서 조선의 많은 책벌레들은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流璃廠)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유리창은 조선의 사신단이 반드시 들러야 하는 방문코스였으며, 명대 이래 중국의 문학과 학술이 거둔 성취와 서구의 문물을 수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또한 조선의 굳어버린 상부구조 곧 '주자의 세계'를 타파할 유일한 대안이자 근원지였다. 이곳을 통해 생산해낸 사고들은 낡은 것이 아니었다. 18세기 조선의 지식계에 형성된 새로운 기운도, 우리가 실학이라 부르는 사유의 기원들도, 베이징의 유리창(琉璃廠)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리시대에도 계속된다. 예전보다 많아진 도서관과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빈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곤 한다. 책 이불과 책 병풍을 만들어 독서에 매진하고, 스스로를 '책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痴)'로 자칭했던 조선의 책벌레들은 조선의 미래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미래까지도 열어주고 있다.
 
지식의 독점보다 나눔으로, 경쟁보다 협력으로, 그리고 폐쇄보다는 개방으로 마음의 가치를 먼저 생각했던 신문명의 개척자 '조선의 책벌레'들은, '근대적' 모티브에 충실한 문화적 선구자로 우리시대가 기억해야 할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박창욱 씨는
1970년 마산 출신. 현재 김해문화의전당 영상사업팀장, 경남영상산업육성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영상미디어 관련 교육 등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을 위해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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