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두메산골에서 보낸 저에겐 소(牛)에 대한 추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소는 집안의 재산이자 한 식구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만큼 아버지는 소에게 지극정성이었습니다. 새벽녘 어머니가 밥을 짓는 동안 아버지는 소죽을 맛있게 끓였습니다. 방학이면 소등을 타고 풀을 먹이러 다녔습니다. 큰 아들 공부시키기 위해 기르던 소를 우시장에서 팔고 온 날은 아버지의 한숨이 커졌습니다. "그 자슥 좋은 집으로 가야 할 낀데…."

지금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은 장래에 소에 대해 어떤 종류의 추억을 간직할지 걱정입니다. 구제역 전파를 막는다는 구실로 100만 마리가 넘는 소와 돼지가 살처분되고 있습니다. 연일 TV와 신문을 통해 집단으로 생매장되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아이들은 생명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있을까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대학살)가 동물계에서 자행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동물학자들은 동물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쁨과 고통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소와 돼지 가족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인간이 파놓은 죽음의 구덩이로 행진하면서 인간을 얼마나 원망했을까요. 생죽음을 지켜보면서 순진한 농심은 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요.

불행중 다행으로 경남지역은 아직 구제역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해시에도 한림과 생림면 등의 1천여 농가에서 22만3천여 마리의 소·돼지 등을 사육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차단한 채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고 있습니다.

구제역의 창궐은 가축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는 분명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입니다. 과거에는 구제역이니 조류독감(AI)니 광우병이니 하는 동물 전염병을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엄청난 고기 소비량 때문에 공장식 축산업이 도입됐고, 이는 동물 사육 환경의 저하와 동물들의 면역력 약화를 초래, 각종 바이러스에 매우 취약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실 우리 국민들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습니다. 1인당 육류 소비량은 1990년 19.9kg에서 2008년 35.6kg으로 18년 만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항생제와 발육촉진제로 사육된 육류의 과다 섭취는 심장발작, 암, 당뇨 등 각종 '현대병'의 원인이 됩니다.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에 따르면 소를 포함한 가축들은 미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의 70%를 소비한다고 합니다.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식의 3분의1을 가축들이 먹어치우는 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육식문화는 사람과 자연 모두에게 재앙을 초래할 뿐입니다.

안동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더 지났지만 정부는 감염 경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습니다. 정부의 초기대응이 허술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하루빨리 구제역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고 국민들도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김해를 포함해 경남지역만이라도 구제역 청정지역으로 남을 수 있도록 당국의 철저한 방역 태세를 촉구합니다.

이번 사태는 가축 전염병에 대한 방역체계를 재점검하고, 축가농가 스스로도 위생관리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멀쩡한 소·돼지조차 한꺼번에 살처분하는 것이 과연 유일한 방법인지 심사숙고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급증한 육류 소비가 가져오고 있는 폐해를 짚어보는 성찰의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밤 식탁에 오른 돼기고기 한 점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구제역이 우리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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