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류봉에서 바라본 석룡산 정상. 가파르게 오르던 산길이 임도를 따라 한결 편안해진다. 비 온 뒤 짙게 깔린 운무가 산을 에워싸 절대고요의 시간이 내려앉은 듯 하다.
석룡산(石龍山)은 금동산과 더불어 신어산군과 무척산군의 마루금을 이어주는 산이다. 계곡이 깊고 숲이 우거져 산세가 진중하고 기품이 있다. 금동산과 이어지는 산줄기 쪽으로는 사람 손길 한번 닿지 않은 듯, 보기 드물게 빽빽한 원시림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번 산행은 생림면 상사촌에서 여차마을로 넘어가는 여덟말 고개를 시작으로, 산불초소, 석류봉(470m), 석룡산 정상을 거쳐 임도를 따라 걷다가, 상동면 소락마을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들머리인 여덟말 고개에 서면, 고갯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는 시루봉과 무척산으로 가는 길이 나 있고, 오른쪽으로는 석룡산으로 향하는 임도가 나 있다.
 
임도 입구의 자귀나무 한 그루, 수천 갈래의 분홍색 꽃술을 달고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 짙은 꽃향기가 아찔할 정도로 유혹적이다. 자고이래로 식물이든 동물이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나 그 여정이, 그리 만만치는 않는 법이다.
 
새벽부터 큰비가 내렸던 터라 숲은 들어서면서부터 촉촉하게 젖어있다. 풀이파리마다 빗방울 듣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지, 싱그러운 풀내음이 발랄하다. 잘 간벌된 소나무들이 가지런하고, 발밑으로는 멍석딸기 덤불이 제 이름처럼 도톰하게 초록의 멍석을 깔고 앉았다.
 
발밑으로 요즘 보기 힘든 개암나무가 열매를 한창 맺고 있고, 여러 종류의 버섯들이 비 맞은 얼굴로 해맑다. 산길은 부드러운 참나무 낙엽으로 덮여 밟을 수록 푹신푹신하다.
 

▲ 깊고 까마득한 계곡. 마치 원시림과 같은 형세에 세상의 잡스러움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것 같다.
소나무 줄기에 돌이끼가 피었다. 천년의 세월을 돌을 먹으며 자라는 돌이끼가 나무에 터를 잡은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 불편한 동거에는 꽤나 깊은 사연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일들이 이치 속에서만 운행되는 것은 아닐 터, 굳이 알 필요도 없음이리라.
 
오솔길을 구불구불 오르다 보니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잠깐 고심 끝에 중간 길을 타고 오른다. 관목 숲으로 시야가 가린 길이 보일 듯 말 듯 어렵사리 이어진다. 칡덩굴과 가시덤불은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설상가상으로 길마저 가팔라져 오르는 데 제법 힘이 든다.
 
언제나 그렇듯 산을 오르는 일은 끊임없는 수행의 길이다. 정상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수많은 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 그 지난한 길 위에 길을 가로막는 너덜도 넘고, 깊은 계곡의 물길도 건너야한다. 그리하여 한 발 한 발 '삼보일배'의 마음으로 궁극의 정점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된비알을 오르다보니 산행 중간에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 탐스럽다. 한 알 따서 입에 넣으니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을 잔뜩 긴장시킨다. 침이 가득 고여 기분마저 상쾌해진다. 곧이어 산불초소가 나온다. 그리고 전망이 탁 트인다.
 
발 아래로 나밭고개와 나전농공단지가 보이고, 그 뒤로 경운산을 비롯한 낙남정맥의 봉우리들이 도열하듯 서있다. 오른쪽으로는 하사촌 마을이 보이고 멀리 생림벌도 펼쳐진다. 무척산은 비에 젖어 함초롬하다.
 
다시 길을 오르면서부터 작은 바위들이 길을 따라 산을 오르고 있다. 심심치 않은 동행을 만난 느낌이다. 계속되는 바윗길. 석류봉을 앞두고 다시 길이 가팔라진다. 숲이 짙어지면서 어둑어둑해진다. 그 사이로 안개가 스며들면서 괜스레 어둠은 더욱 깊어진다.
 
▲ 금동산과 아홉살고개. 임도는 계곡을 따라 사이좋게 하산하며 굽이굽이 휘돌고 꺾인다.
갑자기 사방이 확 밝아오면서 석류봉 정상에 선다. 무명봉이라고도 하고 470m봉 이라고도 한다. 몇 년 전 산불이 나는 바람에 석류봉 정상은 넓은 공터로 변했다. 주위의 나무들이 아직까지 산불의 흔적을 문신처럼 몸에 새기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뻐꾹새 한 마리 참으로 구성지게도 울음을 운다.
 
석류봉에서의 조망은 빼어난 편이다. 우선 신어산 줄기의 마루금이 다 조망된다. 장척산, 생명고개, 도봉산도 보인다. 금동산 줄기 뒤로 양산의 토곡산, 오봉산 봉우리가 살짝 드러나고, 가야할 석룡산 정상도 눈앞에 다가와 있다.
 
석룡산으로 향한다. 여기서부터는 임도가 조성되어 있어 걸음이 편해진다. 임도 주위로 늦은 고사리 순이 피고 오르고, 노루꼬리를 닮은 큰까치수영의 흰 꽃 군락도 펼쳐진다. 고개를 하나 넘고 나서 곧이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시멘트 임도를 버리고 왼쪽 흙길로 방향을 잡는다. 석룡산 정상을 오르는 초입길이다. 이 길을 오르면서부터 짙은 안개가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한다.
 
▲ 석룡산 정상목과 팻말.
석룡산 정상(493m)에 오른다. 석룡산은 옛날 석룡이라는 효자가 부모의 산소를 이 산에 모시고 삼 년 시묘살이를 했다고 그의 이름을 따서 석룡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정상에는 효자의 그 어느 흔적도 없고 석류봉에서처럼 빈 공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정상팻말이 걸려있는 정상목과 소나무 몇 그루만 외로이 서 있을 뿐이다. 정상팻말에는 '석룡산 495m'라 적혀있다.
 
안개가 더욱 짙어지며 사방을 에워싼다. 안개가 산의 풍경을 하나씩 지워가는 것이다. 멀리 금동산의 마루금부터 산 아래의 숲과 주위의 나무이파리까지 서서히 지워나간다. 풍경이 지워지면서 사람의 온갖 번민도 지워진다. 미운 마음과 부질없는 욕심도 안개 속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다복솔 한 그루만 서서 신어산 줄기를 가리키고 있다.
 
정상목 그루터기에 잠시 앉아 쉰다. 정상으로 밀려오는 안개와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어준다. 목덜미의 열기도 가라앉혀 준다. 등산스틱마저 잠시 쉬는 시간, 나무 이파리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릴 뿐 사위가 조용하다. 절대고요의 시간이 흐른다. 그 잠깐의 시각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대신 세상의 이치들이 연꽃 벙그듯 눈을 뜬다. 일각의 시간 속에 많은 그리운 것들이 다가오고 스쳐간다. 삼라만상의 모든 업장이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다.
 
정상에서 왔던 길을 버리고 소락마을로 향하는 임도를 따른다. 크게 길을 휘돌아드니 산 아래로 소락마을이 보이고, 아홉 살 고개 능선이 편안하게 석룡산을 내려오고 있다. 멀리 장척산과 신어산군의 마루금이 병풍을 친 듯 펼쳐져 있다. 아스라한 산그리메가 그윽하다.
 
▲ 호젓한 임도/ 소각마을로 내려가는 임도.
석룡산 줄기 맞은편으로는 금동산이 나래를 펴고 뻗어있는데, 산중턱으로 나있는 아홉 살 고개의 임도가 칼로 긋듯 선명하게 보인다. 임도는 계곡을 따라 사이좋게 하산을 한다. 굽이굽이 휘돌고 꺾이며 온 산의 속살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다. 깊은 골에 푹 파묻혀 한적하고 여유로운 길을 내어주는 품이, 산으로 드는 탁발승에게 길을 터주는 일과 다름 아니다.
 
온산이 원시림의 그 곳처럼 빼곡하고 풍성하다. 갈참나무, 신갈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지게 숲을 이루고, 군데군데 금강송들이 장승처럼 산을 지키듯 서있다. 칡덩굴이 그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는데 마치 나무의 긴 머리카락처럼 치렁치렁하다.
 
계곡은 끝이 안보일 정도로 깊고 까마득하다. 사람의 흔적들은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이는 길이다. 그 길을 홀로이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임도는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듯하다. 멀고도 먼 길, 인생사 돌고 돌아가는 길. 이리 휘고 저리 굽이지며, 일어서는 산맥과 휘몰아치는 강을 앞세우고 나서는 북망 길과도 같다. 그리하여 풀상여 이고지고 가는 길. 길옆으로 낙락장송 한 그루 절벽을 떠받치고 있고, 임도는 부채를 펼치듯 지그재그로 멀리 가는 길 열었다 닫았다 한다.
 
인적이 없는 임도에는 고라니 배설물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어디선가 돌더미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꿩 한 마리 눈앞에서 후드득 날아오른다. 꿩의 깃털이 햇빛에 비쳐 찬란하다. 꿩이 날아간 포물선을 따라 바람 한 줄기 소슬하다.
 
아련하게 들리는 물소리가 임도를 따라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산을 내릴수록 제법 굵어지는 계곡 물소리. 산의 중턱에서 기슭께까지 제법 내려왔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물소리와 함께 임도가 끊기고 흙길이 시작된다.
 
계곡의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면서 사위가 다시 어둑해진다. 빛이 드나들기도 힘들만큼 숲이 짙어졌다. 푹신푹신한 부엽토 길이 피곤을 덜어주고 마음마저 편케 한다. 길섶으로는 하늘나리꽃들이 무리지어 피어있고, 갖은 새소리도 왁자하게 시끄럽다.
 
깊은 숲은 한참 뒤에야 걷히며 빛이 들어오는 길 하나 내어준다. 숲을 나서니 자귀나무 한 그루 다시 반기고, 반가운 인가의 굴뚝에는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밭에는 깨꽃이 하얗게 피었다. 옥수수도 알지게 여물었다.
 
소락마을. 새가 숲으로 날아드는 지세의 명당으로, 백자천손이 나올 자리의 마을. 그래서일까? 한창 결실을 맺는다고 바쁜 소락마을의 여름 오후는 뜨겁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이 푸르러 풍성하다. 비까지 온 후라 더욱 싱싱하고 싱그럽다. 때문에 나그네 마음마저 푸르다. 그리고 싱그럽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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