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뽑힌 화포천은 10여년 전만 해도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인간의 노력에 자연이 화답한 경우이다.
한림면 면소재지 한림정으로 가는 길은 낙동강에 막힌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쪽의 세 갈래 길이 있다. 남쪽 김해대로의 명동삼거리에서 한림로를 따라 화포교를 건너가는 길, 서쪽 진영 본산의 봉하마을에서 봉화산 아래 봉하로와 한림로343번길로 화포천을 따라 가는 길, 동쪽 생림면에서 장재로를 따라 장재교에서 화포천을 건너가는 길 등이 있지만, 남쪽에서 화포교를 건너가는 한림로의 이용이 가장 빈번한 모양이다.

지난 2007년 1월에 새로 놓인 화포교와 1940년의 화포교 어느 쪽을 건너도 좋겠지만, 넓은 새 다리와 달리 오래된 쪽은 다리 앞의 '메기국' 집들과 함께 옛스런 정취가 있다. 화포교와 화포2교(2004.12)를 건너다 보면 왼쪽에 화포천습지생태공원과 오른쪽에 화포천체육공원이 있다. 화포천습지생태공원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여유롭게 걸어보기에 좋은 곳이지만, 시간이 없다면 어느 다리 위에서라도 습지와 숲 내려다 보기를 권하고 싶다. 십여 년 전 만해도 각종 쓰레기가 넘쳐나던 곳이었지만, 람사르 총회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를 계기로 7월까지 산책로, 나무다리, 탐방데크, 생태학습관 등의 정비를 마무리하고 9월의 일반 개방을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엔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도 들었다는데, 우포늪이 아니라도, 탐방이 아니라도, 다리 위에 서 있기만 해도 '원시의 냄새'가 난다. 겨울 손님으로 많은 철새들이 날아드는데, 3년 전엔 천연기념물인 노랑부리저어새가 발견되기도 했단다.
 

▲ 장방리 갈대집.
화포천 건너 한림면 유일의 아파트인 청원한마을아파트(1998.01, 150세대)의 버스정류장에서 경전선 철로 밑을 지나면 오른쪽의 한림정과 왼쪽의 장방리갈대집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갈림길이다. 한림정 마을 순례에 앞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21호 김해장방리갈대집을 찾아나선다. '자암산(子岩山)'으로도 불리는 봉화산 동쪽 끝자락에 동그랗게 갈대지붕을 얹은 세 채의 전통가옥이 도문화재자료(2007. 3)로 지정되었다. 지금 집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이지만 건축수법과 수축증언을 통해 1900년 이전의 초축으로 생각되고 있다. 임진왜란을 피해 낙동강 지류의 화포천에 살게 된 사람들이 강변의 갈대로 지붕을 이은 초막집을 지었다 한다. 갈대집의 전통이 조선후기까지 올라갈 수 있음을 알겠다. 동리에선 '새 풀 집' 또는 '새 집'으로도 불렀는데,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전까지는 마을을 이룰 만큼 흔했단다. 강물이 출렁거리고 갈대가 무성했던 예전의 환경을 보여주는 증인도 되었기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던 모양이다. 안쪽의 큰 갈대 집에는 영강정(永江亭)이란 편액이 붙어 있다. 위에 영강사가 자리하면서 절의 요사채로 사용되면서부터이다.
 
▲ 한림정역.
지난번 소개처럼 한림면의 유래가 되었던 한림정(翰林亭)은 한림학사를 지낸 김계희(金係熙) 공이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지은 정자였다. 공의 호를 따라 퇴은정(退隱亭)으로도 불렸다는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지만 그 이름은 한림면·한림정역·한림초중학교·한림교회 등으로 남았다. 공은 김해김씨 김순생(金筍生)의 차남으로 세종 을묘년(1435) 생원과 신유년(1441) 문과에 각각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부모가 연로해 낙향했다가 홍문관교리·사헌부감찰·경상도도사를 거쳐 나주목사가 되어서는 은혜의 목민과 정성스런 학교 수리로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세조 8년(1462)에 이조참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한성판윤도 지냈다. 공의 손자 김극검(金克儉, 김해뉴스 6월 20일자 참조), 증손 김관(金寬), 현손 김유신(金庾信) 모두 한림학사를 역임했던 인연도 있다. 근년 김해시는 마을회관에 산꼭대기까지 많은 정자를 세웠건만 한림정 복원의 소식은 듣지 못하였다. 뿌리를 기억하는 전통이야말로 우리를 바르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한다는 말은 입버릇처럼 하면서 우리의 의지는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1968년에 이북면 청사로 지어졌던 한림면사무소에 들어선다. 여느 읍면동사무소처럼 흰 칠 단장의 2층 건물이다. 동그랗게 웅크린 1982년 12월 31일 자의 한림도읍기념비(翰林都邑紀念碑)가 있다. 1983년 2월 3일 준공의 '소도읍가꾸기' 사업의 기념비인 모양이다. 1983년 2월 15일에 생림면의 금곡리와 장재마을을 편입해 12리 42마을이 되었고, 1984년부터 '북한 같은 이북'을 버리고 한림면이 되었다는데, 한림면 홈페이지는 1987년의 개명을 주장하고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 류승수 면장 이하 18명의 직원들이 4천492세대, 9천678(남 5천208)명의 주민을 돌보고 있다. 맞은편의 김해한림우체국에서 한림농협, 한림파출소, 한약방, '중국집', 떡방앗간, 농약사, 다방 등을 지나 한림정역에 이르는 '한림의 메인스트리트'를 걷는다. 적은 인구 때문이겠지만 조금은 어둡고 한산한 상가 분위기다.
 
1905년 10월 마산선(경전선) 개통 후 1918년 11월에 영업을 시작했던 한림정역은 일본인이 유림(楡林)역이라 했던 것을 광복 후에 고친 이름이다. 여객보다 양회(시멘트) 수송의 수요가 월등히 많은 것은 여전해, 현대시멘트와 성신양회의 높다란 원통 시멘트 사일로는 한림의 상징처럼 되었다. 경전선복선화와 KTX통과에 맞춰 2010년 8월에 모던한 역사가 되었지만 일평균 100명도 못되는 승객이 단 15회(상행 7, 하행 9)의 무궁화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옆에 있었던 예쁘장한 예전 역사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쓸어버렸다.
 
▲ 2002년 8월 화포천 범람 때 수해를 입은 한림지역 주민들이 이주해 조성된 전원주택풍의 주택단지.
역 건너편에는 오래된 동네 같지 않게 반듯하게 구획된 전원주택풍의 단독주택단지가 있다. 다양한 집 모양과 알록달록한 색채가 평화롭지만 참 아픈 기억이 있다. 2002년 8월 집중호우로 화포천이 범람하면서 철도가 끊기고 한림면 일대가 잠기는 수해를 입었을 때 이재민의 이주단지로 조성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세련된 집들 사이에 보이는 농가풍의 집들이 그 때 지어진 것 같은데, 1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아픈 기억 대신에 예쁜 전원주택들이 들어선 모양이다. 아픈 기억이 좋은 마을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아 한림체육관과 한림보건지소를 지나는 마음이 가볍다.
 
마을 뒤쪽 산자락에는 면사무소 뒤로 한림교회, 한림중학교, 새한림교회, 한림성당, 한림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한림중학교는 6·25전쟁 중의 1952년 2월에 이북중등강습소로 시작해 1961년에 이북중학교를 거쳐 1968년 2월부터 지금 학교이름이 되었다. 지난 2월까지 총 9천13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6개 학급 144명(남 76)의 학생들이 김봉원 교장 이하 22명의 교직원들과 함께 꿈을 키우고 있다. 3층짜리 건물 한 동에 운동장 하나의 단출한 교사지만 사립학교답게 말끔하고 단아한 교정에 자암산의 풍부한 녹색이 인성 좋은 학생을 기르고 있다. 한림초등학교는 1942년 4월에 이북국민학교 장방분교로 설립되었다가 1997년 3월부터 지금 이름이 되었으며, 1999년 9월에 금곡초등학교, 2009년 3월에 한림초등학교 가산 분교장을 각각 통합했다. 올해 2월의 66회 졸업식으로 총 6천52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6개 학급 134명의 학생과 1개 반 14명의 유치원생들이 제27대 이윤옥 교장 이하 27명 교직원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화포천 연계의 환경체험활동을 통해 생태감수성의 함양을 학교특성화 목표로 설정하고 있음이 특별하다.
 
교문을 나서 왼쪽으로 한림로를 따라 가다 대항(大項)마을 끝에서 산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나가다 보면 안쪽 깊숙한 곳에 장방마을회관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지금까지 돌아본 한림정1·2·3구와 대항마을에 장방, 진말, 부평이 장방리에 속하지만, 자암산이 동쪽으로 길게 뻗어 길 장(長)에 방위 방(方)을 쓰는 장방마을이야말로 장방리의 본 마을이다. 소를 키우는 농장과 공장들이 나름대로 적당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듯한 마을로 퍼붓는 빗속에서도 마을회관 정자에서 노선버스를 기다리는 젊은이가 여유롭다.
 
낮은 구릉이 동쪽으로 더 뻗어 나간 곳에 장동(長洞)으로도 불리는 '긴 마을'의 진말(鎭末)이 있고, 반대로 서북쪽으로 가면 낙동강 제방까지 진영면 본산과 경계를 이루는 가산리와 가동리가 있다. 모두 아름다울 가(佳)를 쓰는 '아름다운 산과 동네'인데, 낙동강 물이 넘어들 때 따로 떨어진 동산들이 섬처럼 아름답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 물은 논으로 변했고, 논은 다시 공장으로 변하고 있다. 가동버스정류장 앞에서 낙동강제방에 올라보니 한창 열 올리던 4대강사업이 마무리에 접어든 모양이다. 제방 위는 아스팔트포장의 자전거길이 되었고, 광활하던 모래사장은 무슨 공원처럼 말끔해졌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외진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수변공간을 즐길지는 모르겠으나 엄청났던 쓰레기가 치워진 것만도 우선 다행이다. 참, 맞은편 밀양 하남의 명례리로 건너가던 명례나루(明禮津)가 있었는데 그 복원여부가 궁금해지지만 퍼붓는 비 때문에 확인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 최근 내린 집중호우로 불어난 강물을 빼내기 위해 수문을 연 한림배수장.
제방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보면 섬처럼 보이는 낮은 언덕이 있다. 강 쪽에 동그랗게 솟은 언덕이 길게 들판 쪽으로 내려가는 모양이 숟가락을 닮았다고 시산리가 되었단다. 숟가락 시(匙)에 뫼 산(山)이다. 우리말의 '술뫼'가 한자로 시산이 되었다. 마시는 술이 아니라, "한 술 떠라"의 술이지만, 한자 모르는 세대가 혹시나 '시체 산'으로 오해할까 두렵다. 한림배수장의 설치로 이주한 신촌마을을 지나 모정교(1991.2)에서 화포천을 건너다 낙동강 쪽을 바라본다. 폭우에 열어제친 3개의 수문 아래로 거친 흙탕물이 떼지어 몰려 나가고 있다.
 
모정교를 건너면 금곡리의 모정마을이다. 다리 끝 오른 쪽을 보니 큰 배롱나무 몇 그루와 잘 어울린 모정비각과 해은정(海隱亭)이 화포천 위에 떠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태조 앞에서 세 번 절하며 아홉 번 머리를 찧은 삼배구고두례(三拜九鼓頭禮)의 굴욕을 참지 못한 광주노씨 해은 노한석(盧漢錫) 공이 은거하면서 세웠던 정자와 1909년에 그 내력을 적어 세운 공의 유허비에 용과 연꽃 단청의 모정비각이 있다. 창녕에서 여기 작약산(芍藥山, 377m) 아래로 옮겨와 살면서 청을 미워하고 명을 그리는 마음에 그리워할 모(慕)에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의 정(禎)을 더해 모정(慕禎)마을이라 했다. 아래 쪽 금곡마을에 이르기까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던 공의 후손들이 광주노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원래 고려시대까지 있었던 금곡역(金谷驛)이 해은 공의 장인인 의성김씨의 주장으로 산너머 생림면의 봉림으로 옮겼다 하는데 은거의 뜻이 그만큼 중시되었나 보다.
 
▲ 병자호란 때 인조가 당한 굴욕에 분함을 삭히지 못한 광주노씨 해은 노한석 공이 은거하면서 세운 정자.
1999년 9월 폐교의 금곡초등학교에 들어선 김해체험시골학교와 열녀 최씨의 정려가 있었다는 정촌마을을 지나 금곡마을로 접어드니 400년 이상 된 아름드리나무들이 작은 숲처럼 마을입구를 지키고 있다. 쇠실, 곧 금곡(金谷) 마을의 역사를 보아 온 울창한 나무그늘 아래 버스정류장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토토로'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가 문제인지, 이런 노거수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를 스토리텔링과 대중작품으로 살려내지 못했던 우리 문화의 척박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마음이 편하고 이유 모를 그리움이 왈칵 솟구치는 마을풍경이다. 봉림에서 넘어오는 쇠실고개를 따라 흐르는 금곡천이 있고, 최근 낙동강 건너편 밀양의 같은 이름 금곡에서 '고대제철콤비나트'라 부를만한 대규모 제철유적의 발견 등으로 보아 마을의 전승대로 '철이 나던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마을을 나서는데 400살 넘은 팽나무와 상수리나무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가 절로 목구멍을 넘을 뻔했다. 보호재로 때웠던 당산목의 상수리나무 한 쪽 줄기가 찢어져 땅에 누워 있다. 드러난 붉은 살이 단단하게 보여 애절한 마음이 더 하다. 수명 연장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같은 DNA의 젊은 나무로 세대를 이어가는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 동구 밖에서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선생의 묘비를 돌아보는데 괭이 메고 들로 나가던 어르신 한 분이 까닭을 물으신다. 마침 선생의 후손으로 마을 이장을 역임했던 노좌현(盧佐鉉)씨다. 전해 들은 대눌과 소눌 형제학자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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